브런치북 눈꽃 10화

눈꽃

희망

by 서율

금빛 노을이 하늘을 에워싸며 그라데이션을 그려갔다.

지평선 아래로 사라져 가는 해가 남긴 흔적은 자연이 그린 수채화 같았다. 비록 곧 사라지고 칠흑 같은 암흑으로 뒤덮일 테지만 말이다.
차가워진 밤사이로 작은 별이 모두 가려질 때쯤, 부드러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고운 가루눈이 차분히 내리며 비어가던 거리를 조금씩 메우고 있다. 크리스마스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그리고 내가 마지막 맞는 밤이 될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땅 위에서 맞는 가장 어두워지는 순간인 것 같았다. 흐린 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달빛이 일렁인다. 마치 처음 거리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하다.
딱딱하게 얼어버린 얼음과 같은 눈꽃은 이제 곧 질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시간이 지나지 않는 기분이다.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며 조금은 흐린 날씨에 둥근 해가 또렷해졌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아오며 눈발을 실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갔다.
해는 중천에 위치했고 밤새 눈이 내린 후에 맞은 낮은 오히려 더 따스한 느낌이었다. 겨울의 찬 바람과 바깥에 풍기는 시원한 향기는 은은하게 감도는 채로 옅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그와 함께 옅어지고 있다.

오후에 들어서 햇살이 강해져 갈 무렵, 병원 건물 근처에서 어제 봤던 나이 든 여성이 환자복을 입은 남성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산책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그녀의 모습은 견디기 버거운 불행에 지친 어제의 모습과 달랐다. 두 사람을 감싸는 바람결은 부드러움이 묻어났다. 말을 내뱉은 그녀의 입에서 나온 뿌연 입김이 하늘 위로 올라갔다.
바람에 실려 작가의 꿈을 키우던 남자의 자취방 앞에 다다르자, 카페 알바를 위해 자취방을 나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낯익은 길거리로 향하는 남자의 발걸음은 당찬 모습이 녹아있었다. 바다에 찾아오는 파도를 이겨낸 듯 말이다.
눈에 띄게 큰 아파트 단지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학생 둘이 편한 무채색 옷과 패딩을 걸쳐 입고 맨손으로 눈을 뭉쳐 서로에게 던져 보였다.
“완전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는 중학생쯤 보이는 두 학생의 모습에 발랄함을 더했다.
“아마 올해 마지막 눈인데 많이 만져야지.”
간단한 농담인 듯한 말을 만지며 그들은 깨끗한 눈에 손자국을 찍어 보았다.
편의점을 비롯한 상가들이 모여있는 또 다른 거리에는 눈을 뭉치고 있는 설하가 보였다. 검은색 패딩을 입고 천 장갑을 낀 손으로 작게 눈을 뭉쳐 작은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상가 근처에 있는 벤츠 앞에 나란히 세워놓았다. 만족하는 듯 올린 입꼬리는 그녀의 귀여운 얼굴을 더 예쁘게 만들어주었다. 이후에 손을 털고 일어선 설하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설하는 뒤를 돌았다. 그녀의 부모님 같은 두 사람을 보자 설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웃음소리와 노랫소리 사이 대낮이 지나갈 때쯤엔 가장 첫날에 봤던 남성이 그의 친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맛집이 줄을 이루고 있는 골목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찬 공기에 코가 빨개진 남자의 모습은 처음에 근심걱정 가득한 모습을 완전히 덮어주었다. 연한 홍조를 띤 두 사람은 그 순간만큼 행복해 보였다. 그는 웃었다, 그의 친구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골목길을 걸으며 말이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바람에 종착지는 친근한 거리였다. 하늘이 파스텔 빛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한적한 거리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근처에 자리 잡았다. 뒤에 서 있는 여성은 미소와 함께 아이들을 지켜봤다.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든다며 주변에 있는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여기 눈 진짜 많아!”
폭신한 눈 뭉치로 가득하던 거리의 눈을 서서히 없애며 눈을 뭉쳤다. 둥근 눈덩이가 되어 아이들의 조그마한 손 위에서 느끼는 온기는 상상 이상으로 따뜻했다. 그들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흐리게 거리 바닥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잇따른 여성의 부름에 어린아이들은 뭉친 눈을 소중한 듯 양손으로 껴안고 그녀를 따라갔다.
하늘은 무채색으로 채워질 때 아이들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 화단 주위에 뭉친 눈을 놓았다. 이후 여성을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어린아이들의 뒷모습도 건물 안으로 사라져 갔다.
수많은 사람들은 볼 수 있는 아파트 단지는 따뜻한 온기가 퍼져있었다. 예쁘게 꾸며놓은 단지 안은 크리스마스트리를 비롯한 조명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과 차들도 볼 수 있었고, 귀엽게 장식해 놓은 산타 모양 풍선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없이 느낀 온기에 이제는 얼었던 눈송이가 녹을 때가 된 듯했다. 나는 조금씩 녹으며 아주 조금의 물기가 떨어지고 있다. 미세하게 작아지고 있었다.
거리란 수많은 꽃들이 나뭇가지 대신에 자리 잡아 만개하는 곳이었다. 숱한 일상 속, 평범해 보이는 모습 뒤에 깃들어있던 그들만의 고민과 역경으로 가득 찬 내면에 새싹이 피어오르는 곳.

완전한 밤이 찾아오려 해 아파트 건물에 빛들도 하나둘씩 사그라든다. 나는 자연의 수채화로 스며들어 수채화에 일부로 칠해져 간다. 화단을 파고들어 봄에 꽃과 함께 또다시 피어나야겠다. 하얀 눈이 모두 걷히고 나라는 눈꽃이 다시 피어오르기 전까지 모두가 이른 봄을 맞으며 꽃을 피워냈으면 좋겠다.
마치 봄바람처럼 스치는 온기는 나에게 인사를 나지막이 속삭였다.
새하얀 눈꽃이 모두에게 사무친다.

누구도 괜찮지 않은 깊은 밤에 하루 종일 숨겨낸 그리움과 우울, 외로움과 불안으로부터 살아내느라 무던히 애쓴 누군가에게.

가깝게 의지했던 친구와의 우정을 떠올리며 라일락에 보랏빛이 물들이고,
과거 어느 날의 행복했던 순간을 되새기고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기대하며 방울을 알알이 피워내며.
품어냈던 꿈이 맑은 아침에 가져올 기쁜 소식을 바라며 핀 나팔꽃으로 내일의 해를 알리고,
늘 함께하며 아담한 사랑을 전하던 이가 남겨준 빛줄기를 떠올리며 짙은 어둠에 안개꽃 퍼뜨리며.
그렇게 눈꽃이 장식한 겨울이 지나기까지 추억을 유념하고 간직하며 봄을 반기기를.

-차가운 하루에 핀 눈꽃이 소중한 기억에 희망을 담으며.
-살아갈 우리는 빛날 우리라는 희망이 슬픔을 덮어줄 환희가 되어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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