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눈꽃 08화

안개꽃

영원한 사랑

by 서율

무채색에 질은 밤이 오랜만인 것 같다. 별조차 볼 수 없을 만큼 암흑의 밤에 잠시는 푹 빠져 편안히 내일의 해를 맞으려고 한다. 내가 땅 위에 내려온 이후 어느새 3일이 흘렀다. 거리를 꾸미던 눈송이들은 따분히 얼고 이어서 조금씩 녹아버렸다.
겨우 하루이틀 바라본 나로서 그들을 일반화시킬 수 없다고 해도 확실한 건 그들은 그 추억 하나로 울고 웃는다. 지난날의 옅어진 순간이 그들에게 그리도 소중하다. 그리고 이따금씩 내가 전해준 추억에 그들이 웃는 모습은 너무나도 예쁘게 느껴진다.
때론 추억의 온기가 희망의 온기까지 함께 품기도 한다. 그 과거의 온기가 사람이란 존재를 일컫기도 한다. 눈꽃의 향기를 느낀 이들이 웃음 짓는 모습이 너무 좋다. 여기서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을 정도다.
새벽까지도 길가에 간판은 빛난다. 거리에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 위에 반짝이는 별이 검은색 하늘과 어우러져 하늘에 떠 있는 별 같다. 분명히 사람들보다도 더 가까이서 내가 별을 봤을 텐데 여기서 보는 트리 위에 별이 훨씬 더 예쁘게 느껴진다. 땅 위에서 사람들의 온기는 확실히 따뜻하다. 오래도록 머물고 싶다. 크리스마스까지라도,


-가능한 한 오래.


그들에게 내가 추억은 전해주는 시간이 어느새 나에게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우리가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간은 끝없이 흘러 과거로 지나가 버린다. 자꾸만 흘러가고 흩어지려는 과거의 순간들을 나조차도 붙잡을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오래 간직할 수는 있다. 그 순간과 기억이 일말의 흔적도 남지 않을 때까지 떠올리면서 말이다.
땅 위에 모든 것이 소중하다.
사람의 온기, 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 인기척, 내가 그들에게 전해주는 추억, 그리고 나에게 새겨진 순간까지도.

이제는 익숙해진 루틴처럼 해가 뜨고 첫차가 지나가며 거리가 사람들로 채워지는 모습을 오늘도 바라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다. 선물 가게에서 활기찬 음악이 들려온다. 반대편 거리에 꺼져있던 조명까지 켜지며 크리스마스이브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하루 종일 사람이 끊이지 않는 선물 가게 내부를 들여다보다 이내 멀리에 보이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저 멀리에 아주 작게 병원 건물이 보였다. 5~6층 정도 되는 흔한 건물인 듯했다.


먼 풍경을 바라보다 조금 시선을 내리면 이 거리의 끝이 보인다. 그곳에는 나이 든 여성이 임대건물을 배경으로 걷고 있었다. 휴대폰을 쥐어 든 그녀의 충격받은 듯한 표정이 눈에 띈다. 망연자실, 왜 그녀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동공이 흔들리는 여자, 작은 소리였지만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이름이 뭐였지….”
기억은 원동력이 되어 내면을 밝혀준다. 밀려오는 기억을 하나씩 정리하며 동시에 소중한 기억을 오랫동안 품으며,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다. 이 톱니바퀴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끝없이 밀려오는 기억이란 파도에 소중했던 날은 휩쓸려 사라진다. 또한, 그 기억에 대한 미련마저 함께 조각나기 때문에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기억이자 상상의 영역으로 돌아가 버리게 된다. 기억에 의존한 내면마저 어둠만이 남게 될 것이다.


힘겹게 통화를 건 휴대폰을 꽉 쥐고 있는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톱니바퀴의 작동이 느려지는 것, 우리는 이를 치매라고 이름 붙인다. 흐려지는 기억으로 어느 날 소중한 이에게 “누구세요?”라는 말을 건넬까 두려워 부정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일말의 빛을 찾아 헤매며 아직 내면에 톱니바퀴는 돌아간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녀는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달리 생에 가장 아픈 겨울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톱니바퀴는 작동을 서서히 멈춰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따뜻한 날의 추억은 이미 깊은 곳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어찌 됐든 그녀는 행복을 필요로 한다. 그녀가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더 웃고 싶고 더 즐기고 싶다고 더 살고 싶다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게 우리가 그녀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기다리는 산타가 되어 우리는 그녀에게 과거의 어느 날을 선물해 줄 것이다. 그녀가 완전히 그 순간에 스며들 수 있게끔 짙은 향기를 전해주고 싶다.

***

“나 합격이래, 1월부터 출근하면 된대!”
올해를 잘 마무리해 갈 무렵이었다. 그녀의 둘째 아들은 내년부터 일할 좋은 직장에 취직해 조금은 늦은 독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며칠 전 주말에 가족이 다 함께 모여 그녀의 둘째 아들의 취업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의 삶은 평온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만큼 큰 탈 없이 살아왔다. 흔하지 않을 만큼 다정한 부부 사이와 화목한 가정은 늘 그녀의 곁에 있어주었고 기댈 수 있는 존재였다. 크고 작은 일들에 잠시 지치기도 하고 사소한 행복을 만끽하는 지극히 평화로운 삶이었다.
추운 겨울의 시작은 그로부터 고작 며칠 후 그녀의 남편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집 근처에 장 보러 가다가 신호위반을 한 차에 치인 것이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그녀의 남편에 대해 “기다려보는 방법밖에 없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일말의 예고조차 없이 찾아온 불행이랄 것이 그녀의 하루와 웃음을 서서히 빼앗아 간 기분이었다.
의사의 말을 들은 후, 그녀는 며칠간을 도저히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이 있고 얼마 뒤는 그녀의 첫째 아들이 치매 건강 검진을 예약해 줬던 날이었다. 그녀의 남편과 함께 가려 했지만 오전 시간에 근처 보건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그녀 혼자였다.

보건소에서 간략한 설명 후 검사를 시행했다.
‘올해는 몇 년도 입니까?’라는 간단한 문항에 답하려는 순간, 올해가 몇 년도인지, 지금이 몇 월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어느 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녀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마저 당황했을 정도다, ‘왜 기억나지 않지?’라는 생각이 스쳐 갈 뿐 그녀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보건소 간호사의 설명을 들었지만 머리에 어떤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근처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마지막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채 집으로 돌아간 그녀였다.
그녀가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향한 날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병원에 도착한 그녀는 병원 로비에서 잠깐의 대기 후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료실에 들어갔다. 간단한 문답식 질문 뒤로 의사의 “두 시간 정도 걸릴 수 있다”는 말에 그녀는 여전히 작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의사의 질문에 답변하는 식의 검사는 그녀의 정신을 멍하게 만들었다. 검사가 끝나고 결과 채점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에겐 두 시간에 이르는 시간의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느낌밖에 남지 않았다.
결과 해석을 듣기 위해 또다시 마주 앉은 의사는 잠시 뜸 들이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결과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인지 기능 저하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사가 말한 간략한 설명만으로도 확실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매 종류를 알기 위해서 혈액 검사를 한 번 해보시는 게 어떨까요?”
“결과는 오늘 들을 수 있나요?”
그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답하는 의사의 모습을 본 그녀는 검사 권유에 응했다. 간호사들이 혈액을 뽑은 후부터 검사 결과를 듣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츠하이머 병인 것 같네요. 중등도인지력 감퇴 단계라고 하는데, 많이 진행되지 않았지만 초기도 아닌 상태예요.”
불안감이 있긴 했지만 막상 치매 판정을 받으니 그저 지금까지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병원 수납 후 집으로 향하는 길에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메웠다. “알츠하이머는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어서 현재로선 약물치료로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예요.”라며 치료법을 설명해 주는 의사의 말에 “생각해 볼게요.”라는 답을 내뱉기만 했다.
급격히 불안정해진 생활과 일상에 ‘행복한 가정’이라는 말에 금이 가고 있었다. 다른 가정보다 유난히 돈독했던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의지하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은 그녀를 순식간에 혼자로 만들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물음표에는 적당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치료를 받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누군가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도 없고, 자신이 기댈 곳이 없다. 세상에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서서히 지워버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라진 기쁜 순간들에 대한 허무함이었다.


사색에 잠겨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뎌갔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집 근처에 위치한 길거리였고 저 멀리에 사람들이 보였다. 검사 결과를 아들들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아서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손에 쥐었지만, 손가락이 떨렸다. 평소처럼 번호를 누르려했으나 익숙하던 숫자들이 낯설었다. 애써 별일 아니라는 듯 검색창에 아들 이름을 검색하려던 찰나에,
“이름이 뭐였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증상이 어쩌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무했다, 그냥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근본적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코 앞에 보이는 거리는 따뜻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름을 잊어버린 채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다 우연이라는 불행이 왜 이렇게 겹쳐오는 걸까.
전화번호부를 내려서 겨우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여보세요?”라는 말 뒤에 계속되는 부름에도 그녀는 말문이 막혀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엄마? 무슨 일이야, 괜찮은 거지?”
당황한 아들은 질문을 내뱉었고 그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입을 떼지 못한 채 자리에 멈춰 섰다.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곧이어 그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치매 진단을 받았다. 멀리에 보이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기뻐하고 있을 때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