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들은 제 각각 진로를 정한다.
난 뭘 해야 하지...
대학을 가야 하나... 취업을 해야 하나...
무척이나 망설였다. 그런데 첨 드는 생각은 이거 두 개다
1. 대학을 설사 간다고 한들, 입학금이나 그런 걸 엄마 아빠가 줄까? 언니도 안 줬는데?
2. 그냥 일을 할까? 그래봤자 돈은 다 남동생한테 투자될 텐데?
두 가지 맘이 공존하면서 결론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로 살짝 마음이 비뚤어졌다.
고3 이제 시작이다.
평소처럼 반이 배정되었고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고3의 압박감. 그것이 나에게는 그리 크지 않았다. 고2 때가 더 심한 거 같다.
마지막 고2의 기말고사 때말이다.
하지만 그때 좋은 성적을 내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나는 맘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집안이 부유하지도 않고, 나를 서포트해줄 수 없다는 것은 나의 첫 번째 꿈에서 너무 일직 깨달았다.
두 번째로 꿈이었던 것은 미술을 배우는 것이다. 그림을 깨나 잘 그렸고 그래서 상도 받았었다.
미술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고, 항상 미술 숙제를 내면 만점을 받았다.
우리 이모는 그런 부분을 아직도 자랑하신다. 어릴 때 그림을 찰 잘 그렸다고 말이다.
실력이 너무나도 아깝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마찬가지로 집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술 하면 돈이 안되고 돈만 많이 든다고 미술도구라던지 하는 것을 사주지 않았다. 그 돈이면 다른 걸로 생활비를 쓸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도 다짐했다. 내가 하고 싶고 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구나...
난 이렇게 두 번의 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떤 친구는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밀어줘서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간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병원에 관심이 많아서 간호사로 지원한다고 한다.
각각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갈피가 없다.
그래서 또 한 번 좌절을 했다.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부모님에 대한 원망만 쌓여갔다.
그게 고 3의 나였다.
난 그래서 결심했다.
일단 되던 안되던 부딪혀 보자라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고3동안 많이 놀지도 았았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고 3 학년 2학기 중간땤쯤에 친구들이 하나둘씩 학교를 떠났다. 취업을 하는 친구도 있고 유학을 가는 친구도 있고, 실습을 가는 친구들도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고 답답한 학교를 벗어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어쩌다 보니 직장이 되어버렸다. 나의 첫 직장은 sk텔레콤의 핸드폰 매장이다.
당시 핸드폰 매장들의 생태계는 좋은 번호를 가지고 있는 대리점이 장사가 잘되었다.
지금은 랜덤이지만 그때는 내가 원하는 숫자가 1004번이면 그 번호를 시스템을 잡는 그런 형식으로 대리점들이 번호잡기에 몰두했던 시기이다.
타자가 빨랐던 나는 아주 좋다고 생각하는 번호들 수백 개를 이틀 만에 다 잡아놨다.
예를 들면 1004.1005.1006 이런 거라던지 9999.9998.9997 이런 식으로 외우거나 보기 쉬운 번호 말이다.
중간번호는 랜덤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번호가 세 자리였던 당시에는 예를 들어서 017.233. 이러면
017.233.3330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 번호들을 많이 찾아야 했다.
경우의 수는 많다.,
중간번호를 보고 맞게끔 잘 잡아야 하고 핸드폰 버튼을 누를 때 쉽게 눌러지는 번호들을 골라야 한다. 그때는 ms dos 시절이라서 프로그램이 인터넷이라던지 그런 것이 잘 되어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난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꼴등 대리점을 전국 1등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대리점 대표님이 이뻐해 주셨고, 언니들도 부러워했고 항상 집까지 바래다주면서 내일도 꼭 나와라 하고 당부의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면서 따로 월급 외 수당도 챙겨주시곤 했다.
그 대리점이 대표님은 참 착한 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친절도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월급은 진짜 지금 시절로 봐도 이해가 안 가는 급여다
한 달에 거의 300만 원 넘게 벌었으니 말이다. 그 돈을 나는 고스란히 엄마 아빠에게 다 주었다.
돈관리는 엄마가 다 했기 때문에 어디다가 썼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잘 저금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 묻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때는 그랬었나 보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돈에 대한 개념만 있었어도 그러지 않았을 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냈고, 학교에는 취직을 한 것으로 신고하고 고3의 2학기는 가지 않았다. 졸업식에 참여는 당연히 했다.
그곳에서 친구들과 만남을 오랜만에 가지면서 그동안 겪었던 것들 등 여러 가지 들을 함께 이야기했다.
한 친구는 나에게 너도 간호사를 한번 해봐. 간호사 시험이 곧 있어라고 한다.
나는 간호사와는 성향이 맞지 않는다. 나는 나를 안다.
그래서 거절했다. 네가 잘 어울리지 나는 안 맞은 거 같아.라고 말이다.
그러고 나서 이제 대학을 가기 위한 대학 수능시;험을 볼 때가 곧 다가온다고 한다.
수능시험......................... 시험에 대한 접수를 해야 하고 접수비도 든다.
이 돈을 나는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엄마 몰래 조금 빼서 제출했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도 다 하니까 나도 하고 싶어서 대학에 가기 위한 수능을 쳤다. 수능결과가 나왔다.
꽤 놓은 점수가 나왔다 내신성적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학에 내가 가고 싶은 과를 가고 싶게 되었다.
하지만 그 합격표를 엄마 아빠한테 보여주기란 매우 어렵다.
그게 엄마 아빠의 발목을 잡는다거나 대학을 안 보내준 언니가 상처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 수험성적표의 결과는 내가 보관을 하고만 있었다.
어느 날 엄마한ㅌ 은근슬쩍 물어봤다."엄마 내가 대학을 간다고 하면 보내줄 거야?"라고 말이다.
엄마는 단호했다.
"너네 언니도 안 갔는데 네가 어떻게 가냐" " 못 간다. 그건 아니고 넌 일해서 집에 좀 보태라"라고 말이다.
"그래도 집에 남자는 남동생 하나인데 동생이 잘되어야지 나중에 누나들도 챙기고 하는 거지"라고 말이다.
그 말에 충격을 더 먹었다. 그래서 아예 수능시험 합격 통지서를 울면서 내 방에 서 찢어버렸던 기억이다.
그렇게 나는 그 학교를 가지 못했고 일을 했다.
일을 하면서 그 학교 근처를 서성였다. 그 학교는 부산에서도 꽤 우명한 바로 매인 대학인 부산대학이다.
부산대학과 우리 집과는 끝에서 끝이다. 지하철을 타면 1시간 30분이 넘게 걸린다.
난 그때부터 남포동을 가지 않고 부산대학교 근처에서 놀았다.
캠퍼스를 보면서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고 그저 부러웠다. 캠퍼스가 어떨까? 하고 매우 궁금했다. 친구들이 안내해 준다. 가보니 아주 많은 계단들과 아주 복잡한 조형물들의 건물이 가득하다. 잔디가 깔려있고 돌계단들이 많다.
그 돌계단에서 친구에 말했다.
미성년자가 아니라 이제 술을 살 수가 있다.
"00아 부럽다. 여기서 나랑 너랑 소주 한 병에 새우깡이라도 먹자"라고 말이다.
친구가 말한다.
"그래,. 잠시만 내가 바로 사 올게" 하면서 후다닥 간다. 친구의 뒷모습마저 부러웠다.
아... 난 담세상에 태어나면 진짜 부잣집에 탸어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너무나 부럽고 또 부럽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 큰 캠퍼스가 정말 웅장해 보였다.
부산대학교 근처는 대학교라서 그러니 호프집과 그리고 게임방과 노래방등이 아주 낳았다.
보세옷집도 많았다. 그리고 "도를 믿으십니까"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호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각가지의 풍경을 눈으로 봤고 기억하고 있었다.
때마침 친구가 술을 사서 와서 는 " 한잔 먹자"라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나는 하염없이 슬픈 맘을 숨기면서 친구와 깔깔대면서 소주 한 병을 서로 나눠 마셨다.
부러웠지만 자존심이 있어서 부럽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나의 고3의 큰 단락은 이렇다. 하지만 고 3에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그래서 난 다음 편에서 내가 고3 때 당한 이야기 두 가지를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하여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나의 20대 성장기를 말해주려 한다.
과연 이 책을 쓰면서 나는 30화까지 몇 살이 되어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한 대목이다
그렇게 나의 고3은 시작이고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안에 말 못 한 웃기고 재미난 이야기는 추후에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거 같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가 있지만 번외 편으로 해서 작성예정이다.
오늘도 내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하다.
우리 집에는 남동생은 아직도 결혼을 안 했다. 이제 대가 끊긴 거다.
언니도 결혼했지만 아이는 없다 형부와 상의한 결과 둘이서 행복하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나도 결혼을 한다면 그 점은 상대방엑 양해를 구하고 해야 할 것 같다.
나 자신에게 너무 지쳐서 누구를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말이다.
내 인생 너무 힘들게 살았고, 나의 인생은 이제 제1막이 시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