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 Sep 20. 2024

슬픔수확하는 날

가을은

슬픔이 무르익는 계절

잘 익은 슬픔 수확한다


덜 익은 슬픔

비바람 맞고

남은 햇볕


말랑말랑 홍시같이

잘 익은 슬픔 따다가


동글동글 밤톨같이

잘 여문 슬픔 따다가


가을밤 책갈피에 끼우고

지난밤 일기장에 채운다


슬픔이 다 익었더라도

까치밥 하나쯤 남겨둔다

까치에게도

말 못 할 슬픔 하나쯤 있을 테니


따가운 햇볕

모진 비바람 견딘

발갛게 익은 슬픔의 열매

올가을도  푸르게

자알 견뎌왔다




오늘의 슬픔 사용설명서
대낮에 보면 꼭 피딱지 말라붙은 것처럼 볼품없는 빛깔을 하고 있는 수수이삭도 새빨간 저녁놀 속에서 보면 전혀 느낌이 달라졌다. 마치 아름다운 눈빛이 수수이삭에서 우러난 것처럼 깊이 모를 처절한 진홍빛이 괴어 있었다. 세상 슬픔 알기 전의 어린 나이에도 놀수수 이삭을 보고 있노라면 까닭 모를 청승과 비애가 목구멍까지 치받쳤었다. 그 빛깔이야말로 내 감상의 가장 원초적인 빛깔이었다.
<박완서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수'>


슬픔이 슬픔인 줄 모르던 날이 있었다. 투명인간같이 지내면 작은 심장쯤 보이지 않는 줄 알았다. 슬픔도 차다가 차오르다 더 이상 찰 곳 없으면 흘러넘친다는 걸 몰랐다. 감정에 무지했고 사랑에 무지했고 그리움에 무지해서 슬펐던 날들.


흐르는 물줄기가 눈물인지 빗물인지 가늠할 수 없던 날, 그가 내밀던 하얀 손 차마 잡지 못했다. 내 어둠이, 가난이, 비극이 당신에게 묻어날까 뒷걸음질 쳤다. 안녕너머 젖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당신.


아직도 삶이 서툰 나는 그때의 당신을 먼발치서 바라본다. 다만 그날 거리 골목길에 흘리고 다닌 눈물조각, 무수히 찍힌 슬픔만 선명하다. 당신만큼 나이가 들어서야 이제야 한걸음 다가간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불행과 비극 한가운데 놓인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노라 변명해 본다.

내 귀를 붉게 물들이던 당신의 호의가 순수한 온기였음을. 많이 늦었지만 그때의 당신에게 감사와 사랑을 보낸다.

-열일곱 진아가 (선생님께)





슬픔공부 한 줄 요약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류시화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중에서>


아침에 눈 뜨면 밤새 구겨지고 흐트러진 슬픔을 개킨다. 밤새 쌓인 감정 찌꺼기 탈탈 털어고 주름을 편다. 눅눅한 눈물은 햇볕에 바짝 말려둔다. 살향 묻어난 옷을 입고  맞이한다. 삶은 계속된. 내일에서 또 내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