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교수님은 총 5번의 에세이 숙제를 내주셨다. 이와 별도로 내가 나 자신에게 내준 숙제가 있다. 기본학교가 끝날 때까지 내 철학을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 책이 그 숙제에 대해 내가 나 자신에게 제출하는 결과물이다.
교수님이 내주신 에세이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생각을 키워드로 쓰기다.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총 세 번이나 썼다.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읽어보면 수준이 많이 낮다.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도 되기 때문이다. 이 성장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첫 번째 에세이 나는 누구인가의 일부분이다.
나는 나를 이렇게 정의한다.
"느리고 지속적으로, 때론 내 삶 전체를 바쳐서 생각하고 욕망하는 일"
우리는 일시적이고 충동적이고 얕고 조급하다. 우리는 본능과 잡념의 층에서 살고 있다. 나는 우리의 이러한 의식을 한 단계 상승시키고 싶다. 우리 모두가 잡념에서 생각으로, 본능에서 욕망으로 올라가길 바란다. 예능보다 예술에서, 뒷담화보다 지적 대화에서, 쇼프로보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쾌락을 생산할 수 있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꿈꾼다.
두 번째 에세이도 나는 누구인가이다. 한 부분을 보자.
나는 탁월한 나와 우리와 대한민국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 우선 생각하는 나, 생각하는 우리, 생각하는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럼 생각하는 존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우선 착각을 수정해야 한다. 잡념이 생각이 아님을, 본능이 욕망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잡념과 본능은 일시적이고 충동적이고 그 안에 변화의 힘을 품고 있지 못하다. 반면 생각과 욕망은 전략적으로 판을 새롭게 짜려는 용기 있는 자세다. 그것은 일시적이지 않고 꾸준하며, 충동적이지 않고 의도적이다. 용기를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변화나 상승도 불가능하다. 잡념과 본능은 주어진 프레임을 의심하거나 넘어갈 용기가 부족한 상태다. 이에 대한 인식의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비로소 프레임 바깥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비로소 생각하고 욕망할 수 있는 용기의 씨앗을 얻게 된다.
교수님은 에세이를 보시고 두 줄로 평가해주셨다.
“교과서를 읽은 것 같아. 이 글 어디에도 니가 보이지 않아.”
교수님의 평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졌다. 왜냐하면 평소에 충분히 인식하고 있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고 아내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이라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약점이라고 익히 알고 있던 부분을 교수님으로부터 재차 확인하는 것은 작지 않은 고통이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였다. 인식의 변화를 위해 기본학교에 왔는데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기 위해 ‘인식’이 필요했다. 나는 다시 출구 없는 상자에 갇힌 기분이었다. 나는 숨통을 틔우고 싶었다.
세 번째 에세이는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 중 일부를 보자.
내가 원하는 것은 다짐할 필요도 없이 내가 하게 되는 것에 연결된다. 나는 독서와 글쓰기와 생각에서 떨어질 수 없다. 나를 정화하고 성장시키는 것도 잃어버릴 수 없다. 나를 공동체로 확장하는 것과 공동체를 통해 꿈을 실현 하는 것도 배제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버무리면 내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독서와 글쓰기와 생각을 통해 공동체로 쑥 들어가고 싶다. 공동체로 스며 들어서는 그 구성원과 공동체가 스스로 안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나 계기를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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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위한 물질적 터전과 거기서 생산되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통한 공동체로의 확장, 이것이 내가 가고 있는 미래다. 이것이 나의 철학이고 나 자신이다.
나는 문화적 존재다. 나는 글을 만든다. 내 글로 어떤 변화를 야기하고 싶은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은가? 나는 글을 가지고 세계를 확장하고 상승시키는 일을 하기를 원한다.
나는 최종적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한다. 나머지 모두는 이것의 확률을 높이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나는 왜 고유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가? 그래야 자비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하는가? 그것이 나를 더 자비로워지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왜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가? 그것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네 번째 에세이는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써보는 것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탁월해지려면’이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썼다. 다음은 전문이다.
자유와 탁월은 나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생각하는 존재다. 왜 생각해야 하는가?
모든 것에는 고유한 성질이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고무는 늘어나며 돌은 딱딱하다. 고양이는 생선을 좋아하고 소는 풀을 먹으며 개는 낯선 이를 보면 짖는다. 사람도 조용한 걸 좋아하는 사람, 함께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 등 각자의 기질이 다르다.
나는 세계에 산다. 따라서 세계의 속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출 때 삶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세계의 본질은 생각이다. 세계는 생각이라는 벽돌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을 함으로써 세계를 사용할 수 있다.
이제 생각해야한다는 건 알았다. 그럼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세계다. 내가 세계 속에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세계가 내 안에 산다. 세계는 내 간이나 폐와 같다. 내가 사는 세계가 곧 나 자신이다. 나를 안다는 것은 내 세계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나는 세계를 생각해야한다.
왜 생각해야하는지, 무엇을 생각해야하는지를 알아봤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세계를 생각하는 키워드는 높낮이다. 높낮이를 가지고 생각해야 세계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고 각각의 가치와 영향력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세계에서 나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다.
자유와 탁월은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행동이 힘이 들고 자꾸 막힌다면 어찌 하는가? 이것은 내 철학이 아직 강하지 않고 철학에 대한 자각이 약해 행동으로 발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식과 생각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지식과 생각 때문에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이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지식과 생각은 나의 주인이 될 수도 있고 종이 될 수도 있다. 지식과 생각에 내 삶을 빼앗기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반면에 내가 주도권을 잡고 지식과 생각을 사용하면 내 삶은 높아지고 넓어진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내가 지식과 생각을 운용하면 지식과 생각은 나에게 대상이지 나 자신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이 질문은 아주 지적이고 높아 보인다. 하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왜 그런가?
위의 질문을 옳다고 여기고 지식과 생각을 나로 보지 않으면 지식을 쌓고 생각을 하기 위한 동력을 내 안에서 구하기 어렵다. 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을 찾는 힘은 나 자신이 목이 탈 때 가장 발휘되기 쉽다. 그럼 이런 이유를 제외하면 위의 질문이 가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위의 질문은 무가치하다. 실재하는 세계는 마음을 넘어서 있다. 지식과 생각은 실재하는 세계이고 지식과 생각을 가진 나는 마음이다. 지식과 생각이 영향력과 통제력을 행사하면서 내 삶을 만드는 진짜 나다. 지식과 생각을 가진 나는 높이가 0인 감각일 뿐이다.
꾸준히 지식과 생각을 높이고 새롭게 해야 한다. 이것이 내 존재 이유고 본질이다. 지식과 생각이 꾸준히 높아지고 새로워져서 마음에서 끝도 없이 멀어지면 다시 돌아온다. 커다란 원을 그리고는 종국에 마음과 만나 하나를 이룬다. 이제 실재하는 세계는 곧 마음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을 조금 더 땅으로 내리면, 내 철학에 맞는 삶을 살면 그게 곧 깨달음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이 질문들에 용기를 더해 깨달음으로 나아가자.
마지막 다섯 번째 에세이는 다시 ‘나는 누구인가’였다. 교수님께 드리는 편지글 같았다. 다음은 그 일부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 미소를 떠올리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적어보겠습니다. 우선 이 글을 적는데 아주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임을 알려드립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졸업을 앞둔 마당에 ‘또 이렇게 끝나면 안 되는데’하는 조바심이 한 몫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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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잘 살기를 바라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바라는 삶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꽃피는 삶’이라는 자각이 있었습니다. 저의 신비하고 비밀스런 부분은 ‘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자,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싶어 합니다. 상담도 하고 강연도 하고 글도 쓰면서 집단무의식에 공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다섯 번의 에세이 숙제는 끝이 났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해 깊고 언어적으로 사유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글을 쓰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자기 경험을 쓰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먼저 글을 쓰고 삶이 따라가는 사람이다. 나는 두 유형이 섞여있는데 에세이에서는 모두 후자였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쓴 글이었지만 내 삶은 그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조용히 움직였다. 내 글은 나의 무의식에 내리는 일종의 명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