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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air May 28. 2022

물려받기 좋아? 싫어?


몇 년 전에 다시 서울에서 살림을 시작할 때, 새로 그릇을 사지 않았다. 20대 때 내가 서울에서 자취하며 사용하던 보관되어있던 그릇들을 다시 꺼내 사용했고, 부족한 그릇은 시댁에 보관되어 있던 그릇들을 가져와 사용했다.



시댁 그릇장엔 많은 그릇이 보관되어 있었다. 예쁜 찻잔과 컵들도 즐비했고, 커다란 접시, 작은 접시 종류가 가짓수가 정말 많았다. 그런데 뭐 새것 아닌 중고가 그렇지 않나 찻잔 같은 것은 오래되어 잔의 내부 색이 변해버린 것도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취향이 거의 없었다. 접시 같은 것들도, 면기 같은 것들도 올드한 느낌이 강해서 우리 집으로 가져오기 난감한 것들이 있었다. 빈티지 그릇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던데 나의 경우는 그런 쪽은 아니어서 꺼려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릇이 종류별로 필요하긴 하니까 몇 가지 골라 가져왔다. 솔직히 득템이다 이런 마음보다는 모든 것을 새로 사서 사용하기엔 한꺼번에 많은 돈이 드니까, 일단 있는 것을 사용해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한번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면 망가지거나, 고장 나거나, 사용하지 못할 정도가 돼야 놔버리는 사람이었기에(엄청 알뜰한 척한다) 그 그릇을 지금껏 계속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5년 정도를 사용했다. 첫 번째 집에서 잘 쓰다가 두 번째 집에 가서는 요즘 인기 스타일 그릇으로 한 세트 정도 사서 함께 사용 중이다. 그래서 세 번째 집에서 살고 있는 지금은 다양한 모양의 그릇들이 자리 잡고 있다(물론 중간중간 컵은 정말 많이 산 것 같다).








아무튼 문제는 이번에 일어났다. 나의 하나뿐인 면기가 깨졌다. 하필 올해 이번 달에만 그릇, 컵이 3개나 깨졌다. 내가 아끼던 찻 잔이 한 개 깨지고, 다른 컵은 손잡이가 깨져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그리고 한 개의 면기가 이가 나갔다. 일단 깨진 컵은 버렸는데 이가 나간 면기는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애초에 마음에 드는 면기도 아니었고 그냥 면기가 필요해서 시댁에서 가져와 사용하게 된 건데 그러기엔 너무 잘 사용하던 그릇이어서 말이다.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던 면기





옛말에 깨진 그릇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그릇의 이가 조금 나가서 앞으로 사용할 수는 없긴 한데 버리기가 아깝다. 혹시나 해서 시댁에 전화해서 똑같은 면기가 있냐고 물어봤는데 이제 같은 것은 없다고 하셨다. "다른 그릇도 많은데 다른 것으로 가져다줄까?" 하셨는데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그릇을 들고 오실 필요는 없으니까.









"그릇은 절대 사지 말고 우리 집에 정말 많으니 다 가져가서 사용해라" 수년 전에도, 이번에도 똑같은 얘기를 들었다. 옷이든 그릇이든 취향이라는 것이 있는 건데, 미니멀을 지향하고 환경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새로 구매하지 않고 시댁에 있는 물건을 가져다 사용하던 것뿐인데 솔직히 저런 얘길 들을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차라리 시어머니께서 "여기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다 쓰고,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새로 사려무나"라고 말해주셨으면 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가져다 사용했을 것 같다.



가끔 이렇게 알뜰살뜰하게 사는 내가 기특하고 훌륭하다가도 갑자기 어느 순간 궁상맞고 구질구질해버릴 때가 있다. 차라리 시댁에 그릇들이 많이 없었더라면 내 취향에 맞는 것으로 조금씩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어머님은 왜 본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실컷 사시고, 그것을 나보고 꼭 사용해라 마라야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서 화가 나기도 한다.  



여전히 고민 중이다. 면기 하나 사는 것이 고작 뭐라고. 사실 이미 면기를 사볼까 하고 그릇가게를 기웃기웃거렸는데 마음에 쏙 드는 것을 못 찾았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매력적인 면기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면기 대신 파스타 그릇을 면기로 사용하고 있다. 태생이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서 파스타 그릇은 왠지 파스타 그릇으로만 사용해야 할 것 같아서 고민하다 급한 김에 사용해 봤는데, 딱히 어울리진 않지만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없다. 사실 면기는 그냥 움푹 파이기만 했으면 사용하는데 아무 문제없는 그런 그릇이었던 것이다.





친구가 선물로 줬던 파스타 그릇, 현재 면기로 사용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서울에 가면 또 시댁의 그릇장을 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릇장을 들쳐보지 않으면 평생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썩어져 버릴 것이 분명하니까... 휴,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친정 그릇장은 쳐다도 안보는 내가 왜 시댁 그릇장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친구에게 작아진 아기 옷을 보내주려고 정리를 했다. "깨끗한 것만 보내줄게" 했는데 정리하고 보니 제일 커다란 박스 한 개가 차고 넘친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보내는 택배비도 꽤 들 것만 같은데, 과연 이것을 보내주는 것이 괜찮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시 친구도 마지못해 내가 보내는 옷을 받고 취향이 아닌데 이것을 어떻게 입혀야 할까? 고민이나 걱정하게 돼버리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거면 아예 보내주지 않거나 차라리 당근에 무료드림으로 진짜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 역시 물려받는 것도 물려주는 것도 어려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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