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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j Aug 27. 2024

고독한 현대인

ㅡ카프카의 '변신'ㅡ


카프카의 <변신>이란 소설은 요즘 현대 사회 문제에 경각심을 준 것 같아 새롭게 다시 읽혀졌다. 작가 자신의 고독하고 병약한 삶을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아무 설명도 없이 벌레가 된 주인공처럼 자신의 고독한 처지를 투영한 건 아닌지 벌레처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 건 아닌지 참 난해한 소설이다. 40대에 폐결핵으로 요절하기까지 고독함과 쓸쓸함을 문학이란 창작의 고통으로 견디면서 <변신>이란 작품에 쏟아낸 건 아닐까 싶었다.


최근 소외되고 고독해진 현대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1인 가족수가 4인 가족수를 앞지르면서 혼자 사는 현대인들이 늘고 있다. 고독사 문제는 끊이지 않고 특히 사회에 진출하지 못한 은둔 청년들도 몇 만 명이나 되면서 사회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크게 사회적 이슈가 된 사건 역시 젊은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분노해 그 화풀이 대상을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풀었다.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 속에는 무직에 사회 생활 경험을 하지 않은 채 고립되고 가족과도 단절된 젊은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이유로 죄가 정당화 되거나 합리화 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문제와 고민을 직시해야 할 때이다.


 <변신> 에 나온 주인공 그레고리도 이유없이 벌레로 바뀐 뒤에 철저히 고립되고 가족에게조차 외면 당한다. 말소리조차 안 나오고 간단한 행동 하나도 하기 힘들어 버둥거리며 절망하고 답답해 하는 아들을 가족들은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고 보살피기 보단 수치스러워하고 쓸모없어졌다고 여기며  방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게 한다. 심지어 청소도 해주지 않고 정성스럽게 음식도 주지 않으며 방치하고 냉대 했으니 그 심적 고통을 느끼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간 그레고리는 소외되고 고립된 현대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벗어날 수도 없이 암울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만이 남아 살아갈 희망을 포기한채 고독과 싸우는 사람들 말이다.


 변신은 가족과의 단절도 보여준다. 가족을 더 이상 안락하고 포근하며 친밀한 대상이라고 느끼기보단 기능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돈 버는 기능. 집안 일하는 기능. 공부하는 기능. 좋은 대학 가서 졸업 후에 좋은 직장을 다녀 보상 받는 기능. 사회에서 인정받는 기능 등등...


 가족을 기능적으로만 보기에 그레고리가 벌레가 되어 더 이상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할 때 가족은 그를 가혹하게 냉대한다. 연민과 통한으로 소통하는 대신 숨기고 감추려고 한다. 음악소리에 이끌려 처음 밖으로 나온 아들을 보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로 화가 난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상처 입은 그레고리는 그 순간 살아갈 의미와 희망을 잃었을 것이다.       


 그레고리의 아버지는 얼마 전 우울증을 앓고 있는 딸과 멀쩡한 아들까지 수면제를 먹여 살해하고 자신도 자해한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아버지나 혼자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다고 한달 된 아기를 땅속에 묻은 비정한 엄마와도 흡사하다. 마치 연민이나 동정. 죄책감 등의 감정을 잃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가족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이며 소중한 생명인데 가족이란 이름으로 자행되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절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는 그 순간 그레고리는 모든 희망을 잃고 좌절하며 삶의 끈을 놓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건지도 모른다. 그레고리가 죽고 난 뒤 가족 나들이를 가서 안도하며 홀가분해 하는 마지막 모습은 사랑이나 희생. 헌신이 무색하게 변질된 매정한 가족이었다. 변신한 그레고리를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던 골칫덩어리로 여기고 그가 사라져 해방됐다고 느끼니 씁쓸하지 않을 수 없는 결말이다.


 <세이프 오브 워터> 라는 영화에서는 청각 장애인 여주가 온몸이 비늘로 덮힌 괴생명체와 교감하며 서서히 서로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낀다. 그를 위해 음악을 틀어주고 삶은 계란을 제공하며 진심을 다한다. 그를 해부해 실험대상으로 삼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서 탈출시키는 모험을 감행하고 그를 숨쉬게  하려고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운다. 가족이 아님에도 진정한 사랑은 용기를 내게 만들고 어느 순간 희생까지 감수한다. 진정한 사랑은 그녀마저 아가미가 있는 생명체로 변신하게 만들어 둘은 완벽한 사랑을 이룬다는 독특하지만 감동을 준 영화였다.


 같은 변신이어도 소설은 혐오의 대상으로 영화는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섰다. 소설은 쓸쓸한 죽음으로 영화는 사랑의 완성으로 결말도 달랐다.


사랑은 외면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어 혐오스러운 외형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하물며 가족인데도 그 본질과 책임을 회피했다. 벌레로 변신했더라도 얼마든지 애정과 헌신을 다할 수 있었을 텐데 희생하고 싶지 않은 본능대로 행동한 것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이상 무가치한 가족에게 희생하고 싶지 않고 자기애가 너무 강한 현 세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점점 피폐해지고 사랑과 애정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 소설에서 다시 한 번 경각심을 갖고 따뜻한 가족애와 인간애를 회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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