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하나 뿐인 말

원석이 흐드러진 초원

by 박경이


대문 옆, 작약이 흙을 뚫고 오르더니 오늘 펼친 잎사귀 가운데 꽃망울 보인다.

연두빛 비치는 옅은 갈색에 붉은 느낌 감돌며 반짝이는 단단한 꽃망울,

겹겹의 사랑이 농축된 한 덩이 태아 같다, 아이들 머리 같다.

햐~ 너 정말 엄청나다고 속삭여 주었다.

두 손 모아 숱한 벌나비를 부르던 찬란한 꽃의 시작이 이러한 줄 몰랐다.


땅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상상하며 들어와 뜨거운 마음으로 커피를 내린다. 책정리를 마치려 잔을 들고 2층으로 오른다. 허리를 곧게 펴고 계단을 오를 때면 오선지 위의 음표가 된다.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면서 넓어지는 시야와 몸의 리듬감에 집중하며 백색의 자유다 싶은 때가 있다. 인류 초기 발명품 가운데 계단이 으뜸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정리하는 중에 책상 밑에서 편지묶음이 나왔다.

이사할 때만 한 덩이씩 버렸던 아이들의 편지. 충분히 묵힌 다음 학교와 아이들이 생생히 연결되지 않을 때야 버릴 수 있었다. 애들 이름이 낯설기조차 할 때, 녀석들이 내게 나눠주었던 빛이 이제 걷혔다 싶을 때 말이다. 이제 정말 다 버린 줄 알았는데. 네댓 덩어리가 담긴 낡은 종이가방, 왜 달고 온 거지, 버릴 것으로 밀어놓는다. 아니야,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겉봉이라도 훑어보고 버리자. 가끔은 귀찮기도 하던 애들 편지, 이제 더이상 받을 일도 없는 걸, 뭐. 사진이랑 말린 단풍잎이 떨어진다. 에고!


‘지구에서 가장 좋으신 선생님께’, ‘가장 아름다우신 분께’...... 착한 녀석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이 맞구나. 이 아이들이 아니라면 누가 세상에 하나 뿐인 말을 내게 줄 수 있을까. 칭찬 받으며 사랑 받으며 잘 살았던 게 나였구만. 얘들아, 고맙다. 어디서 무얼 하든 활짝 가슴 편 채 웃고 있기를.


많은 아이들의 꿈과 가능성들이 부딪치고 발현되는 장소, 학교는 어지간하면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성인들의 그리움과 회한이 부러움과 애증으로 반사되는 장소이기도 할 것이다. 전국민적 욕망이 자식을 통해 겹으로 투사되고 뒤얽히는 학교는 대한민국 불멸의 장소일지도 모른다. 학교와 교육에 뭇매질을 하며 자기 삶의 원망을 떠넘기는 이들도 종종 있으려니와 아이들을 닦달하고 추궁하며 인격체로 보지 못하는 교사들이 있음에도 학교는 생명력 넘치는 장소다. 돈밖에 모르는 어른을 흉내내는 아이들도 있고, 대화를 시도하기 전에 고발부터 하고 보는 학부모가 있어도 학교는 따뜻하고 희망차며 즐거움을 잃지 않는다. 푸른 생명과 원석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진 광맥 초원, 그곳에서 이름을 부르며 아이들을 보석처럼 빛내는 멋진 교사들은 여전히 많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이 스며들어 꽃피고 열매 맺도록 돕고, 크고 작은 지진을 거듭하며 나아가도록 격려하는 어른, 지켜보며 함께 아프고 손 내밀며 기다리는 어른이 있는 곳이 학교다. 배려와 책임, 좌절·상처와 회복, 자존과 존경, 권위와 도전, 이해와 관용을 연습하는 든든한 울타리 있는 공간 학교. 피할 수 없는 생의 상처를 성취의 동력이자 창조로 바꾸는 용기를 배운다. 아이들은 또래와 함께 그런 학교를 통과하며 큰다. 중층적 관계 가운데 몸살을 겪고 깨달으면서 주체로 분리된다. 때로 관심과 걱정을 빙자한 이기적 요구와 간섭 속에 흔들리면서도, 사회적 지원 속에 지속적 변화를 일으키는 가능성의 자리는 여전히 학교다.

학교, 수많은 점들을 찾고 이으며 내 생을 만든 곳. 아이들과 동료들, 무궁했던 이야기 그리고 내 선생님들, 나를 키우며 서로를 키운 사람들이여 고맙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나는 종이 위에 있는 이름을 불러본다.

한주야 영미야 병규야 세희야 세욱아 지연아 영자야 보림아 승기야 현주야 귀미야 은희야 혜경아 숙희야 효식아 명호야 은아야 이든아 은이야 창섭아 명주야 귀희야 창미야 명희야 경림아 미영아 희순아 윤선아 영환아 지현아 옥희야 주호야 지원아 주남아 병예야 동옥아 예원아 화춘아 혜란아 지상아 경자야 기선아 명진아 여경아 경은아 혜미야 소라야 보화야 경운아 경숙아 정숙아 영은아 동훈아 희경아 윤정아 은정아 영란아 인환아 영경아 미연아 지혜야 원숙아 현수야 혜원아 지현아 누굴까요야 girl아 여수야 ??야 나예요야 접니다야 저예요야 호호저야 천사야 딸래미야 아들아 여우야 제자야 제자야 제자야......

얘들아, 나를 딛고 간 아이들아.

이제 네 목소리로 당당히 네 이름을 부르렴.

keyword
이전 08화나는 뻥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