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까지 준 거 알지?
뿌옇게 깨어난 대지가 깊은 숨 끌어올리느라 어깨 들썩인다.
현미팥밥에 파득파득 봄동, 봄이 동동동 아장아장 걸어오던 날.
된장·고추장·잣·마늘·파·참기름쌈장, 사람을 구하는 음식특공대.
터질락말락 동그라미 노른자 흔들리는 달걀부침,
번번이 어린 나를 사로잡던 호사스러운 노랑.
영희 전화다. 총명한 눈으로 나를 경청하던 열네 살 아이는 지금 ‘남편이라는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서 놓여나려는 중이란다. 선택의 책임, 은근과 끈기로 견디기를 이젠 그만두고 싶단다.
내가 뭘 알겠니. 고요히 네 마음을 읽고 목소리를 깊이 들어봐. 아이고,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난 여전히 국어선생인가 봐. 읽기와 듣기를 하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젠 정말 쥐뿔도 모르니까 가르칠 것도 없어, 얘. 그렇지만 영희야, 이왕이면 쓰기도 좀 할래? 쓰기가 짱이여. 너 중학교 때 글 잘 쓴다고 칭찬 받은 기억나지? 네 말로 네가 너를 기록하고 너를 풀어봐. 남의 손과 말로 뒤섞이고 휘갈겨진 걸 네가 고쳐쓰는 거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지 깨닫는 동시에 못난 부분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도 가만가만 따라 오더라구. 감사는 덤이고. 그러니 살기가 수월해지고 다음으로 훨훨 넘어가는 것 같더라. 시간 걸리지. 그게 사는 거 아닐까. 그렇게 가면 가다가 넘어져도 힘이 나는 것 같더라.
호호, 영원한 선생님이세요. 목소리만 들어도 저는 힘이 나요.
그게 오래 쓸 힘이면 좋겠구나.
그럼요, 쓰죠. 저는 팔자 좋은 사람인 거죠. 선생님이 계시니까요.
팔자라, 그거 나쁘지 않네. 비극적이지 않아. 그래서 어쩌라구! 하고 되받아칠 팔팔한 힘이 있는 말이야. 너는 네 팔자를 네것으로 소중하게 거머쥐고 있구나, 다행이야.
오후에 시간 내서 선생님 뵈러 가야겠어요.
그래? 넌 시간을 낼 줄도 아는구나, 멋져. 언제나 환영이야.
좋아하시는 빵 사가지고 갈게요.
응, 아주 좋지~~
어서 와, 어서 와, 꼭 끌어안는데 놓아주고 싶지가 않다. 빵 많이도 사왔네. 저도 빵 무지 좋아해요. 잘됐다, 올리브빵이랑 바게트는 나도 좋아하는 건데. 저번에 그러셨어요. 그래? 우리 빵 먹은 적 있어? 저번에 내가 밥 안 해 줬더냐? 먹었죠~, 부추김치랑 생채 맛있었어요. 빵 이야기도 했구요. 그랬구나, 흐흐 그게 기억나던? 그럼요.
2층 계단으로 대번에 올라가는 영희는 중학생이다. 저도 이렇게 살 거예요. 그래라~ 요것조것 예쁘고 맛난 빵 따라, 신선한 콩 갈아 내린 커피 따라 오래 흘러나온 이야기는 무게와 통증을 더하며 숨이 막히기에 이르렀다. 많은 남성고객들이 사람으로 봐주지 않는다는 여성보험설계사 영희.
만만하게 보고 덤비려는 손아귀 느끼면서 여성으로 살기의 불편과 불안, 버거움, 분노. 그들의 이상 발정과 비정상적 이중성에 대해 우리는 말로 정리, 내던지고 털었다. 경쟁과 점수에 찌들어 불건강하게 보낸 청소년 시절을 위해 작은 진혼굿을 하고 식민지 남성의 열등감과 군사문화, 집단주의에 포획당한 채 대물림 된 기묘한 우월적 태도를 애도했다. 자신의 노력과 전혀 무관한 성기에 영혼을 매달고 일단 여자는 무시함으로써 자존심을 느끼는 허허로움을 어쩌랴. 존재로서 자신을 돌아볼 수 없는 철저한 무능과 성찰을 모르는 비천함에도 조의를 표했다. 경악, 비난을 넘어 해석과 동정에 연민까지도 가능하지만 용납은 없다. 다른 존재들을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몰아 황폐하게 만들고 분노와 모멸감 속에서 시나브로 죽게 만드는 일상적 범죄.
아이고 더 말 못 해요. 선생님은 잘 모르실 거예요.
맞다. 선생이 뭘 알겠니. 교과서에 안 나오니 참고서엔들 나오겠냐.
하하, 이제 괜찮아요, 선생님. 대부분 지난 일이예요. 요즘은 많이 달라졌잖아요.
그래야지, 2000년 걸릴지도 모르지만 우리 한국은 30년이면 충분할 거야.
영희는 부드럽고 탄탄하다, 많이 울었으리. 따박따박 말에 조리와 여유가 보인다, 힘들고 힘들었으리.
이제 남성고객들이 불편하지 않아요.
인간 대 인간으로 보는 남자도 간간이 있고 ‘사람에 가까운 남자’도 더러 있더란다. 그렇게 너는 결국 웃으며 홀로 섰구나. 네 몫의 시간이다. 담대하게 가렴.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 영희의 이야기를 끊으며 다음을 약속한다.
얘, 이제 일하러 가거라. 부지런히 벌어서 애 키워야지. 나 빵도 사주고.
하하하, 그럴게요, 다음엔 빵집에서 뵐까요.
그러자, 새로운 걸로 골라 먹어보자, 내가 사 주마.
제가 많이많이 산 다음에 그러세요.
그려~
나가기 전에 계단으로 2층을 올려다보더니 영희가 말한다.
저도 선생님처럼 이렇게 살 거예요. 정말이에요.
그려~ 나보다 더 잘 살 거야.
찰떡같이 대답했으나 ‘이렇게’가 아리송하다. ‘처럼’과 ‘이렇게’가 영희의 꿈이라면 나는 하여간 ‘잘’ 살아야 하는 거다. 영희의 차 꼬리를 향해 오래 서있는다. 영희야, 오늘은 네가 선생이고 나는 참고도서였구나. 슬쩍 숙제까지 준 거 알지? 고불고불 마을길을 요리조리 흘러서 큰 길 삼거리에 도착했겠구나 싶을 때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왔다. 갑자기 목이 갑갑해진 나는 이층에 올라가서 쑥대머리를 세 번 내지르며 춤 같지 않은 춤을 추었다. 더 이상 소리 없는 몸울음이 아닌 당당한 몸의 발언이자 영희를 위한 함성.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