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를 잡아 놓고
새벽에 가로등 불빛을 사선으로 흔들며 내리는 비를 보았다
번쩍이는 땅이 빗줄기로 열어놓은 흙가슴을 보았다
느리고 깊은 숨소리가 아련하게 전해온다
새로운 거울 하나 만들려고 내가 책 읽는 걸 비가 알아챘나보다
낡은 거울이 얼룩덜룩하여 아예 보지 않고 지냈으니 말이다
달라진 나를 보게 될까, 좋은 변화일까, 누구에게 좋은걸까
책 덮고 누워 딩굴딩굴 창밖 멀리 눈길을 보낸다
오늘 햇빛은 어쩌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나
비 살짝 온 뒤라 더욱 요란할텐데...
과연!
촹촹~ 심벌즈가 연달아 울린다
수천만 개로 퍼져나가며 휘황찬란하다
부채춤의 군무, 수많은 공작이 일시에 꼬리를 펴고 흔든다
햇빛 그물을 피하지 못한 채 사로잡히는가 하면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에 박태기와 황매, 벚꽃...
땅바닥이 들썩,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올록볼록
줄줄이 모조리 돋고 피어 반짝번쩍 알록달록 홀리고 꼬드기며 불러쌓는다
내게 오세요, 날 보러 와요, 이리로 와요 나와요와요와와...
간질간질 속살속살 저르르르 세상에 이런 난리가 없다
봄, 어지럽다, 집에 있으면 안되겠다, 그런데도 난 봄을 모르겠다. 나는 아직 봄이 아니다, 봄이 되지 않으려는 겨울일지라도 소란하여 못살겠다. 나무들은 가만히 있는데 천지사방이 흔들린다, 작은 숨들이 모이니 폭풍이 된다. 다정한 유혹, 소리없는 울림, 나무의 리좀이 나를 타고 오르며 간지럽힌다. 바빠 죽겠고 힘들어 죽겠는데도 기쁘고 즐겁단다. 바람처럼 흘러 전류처럼 퍼지며 나를 건드린다, 움직이게 만든다. 아하, 정중동!
나는 도토리처럼 구르며 깔깔 웃다가 일어났다. 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이전에 봐두었던 DIY공방을 찾아갔더니 식당이 되어버렸다. 큰 조명가게를 발견하여 기쁘게 들어갔더니 건축용만 대량으로 취급한단다, 맘에 드는 스탠드를 살 수 없었다. 이제 뭐하지, 점심 약속까지는 멀고멀었는데 어쩌나. 아이고, 가져온 책도 없다. 수선스런 나무들 때문에 책 챙기는 걸 잊었다. 공책조차 없으니 쓸 수도 없네. 카페도 열기 전이다. 엔진오일 갈자! 적어도 30분은 걸릴 거야, 맘이 놓인다. 참 놀라운 일이다. 도대체 시간이 이렇게 걸리적거릴 수도 있는걸까. 단박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아버렸다. 시간이 걸리적거리기도 하는구나. 그렇구나 어이없는 일이다. 읽을거리 갖지 못한 자의 초라함,이라고 표현할만한 상태였다. 나, 난 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겨? 남의 생각과 말이 없으면 나는 뻥이여? 봄에 쫒겨 나온 자는 다시 책과 활자에 쫒기는 중이다. 내가 나를 움직이게 하는 줄 알았는데. 남들 덕분에 움직이며 살았던 건가? 과장도 비유도 아니고 정말로 말이다. 그래 그렇구나, 무수히 다른 이름들로 나는 나를 만들었구나. 사람들아 나무야 꽃들아 햇볕.벌레.바람아 고맙고 고맙다.
집에 와서 반갑게 책을 편다.
한바탕 생각에 뒤집히고 나서 기분 좋은 어지러움
책을 덮는다 지금은 봄, 책을 보는 봄이 아니다
제정신일 수는 없는 봄, 나비가 이리도 날아다니니 총기도
활자도 생각에 시선이 마음까지 훠얼훨
하늘·바람·햇빛으로 들어올려진다
잡아 앉힐 수 없는 말, 시어詩語들, 마음들
나비......
나비를 잡아 놓고 가만히 앉는다
봄, 취한다, 나는 봄이 된다
나비를 놓아 주니 새거울 하나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