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화장실 갈 때 스마트폰을 챙겨가게 됐던 것 같다.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은, 화장실에서 손을 닦고, 어쩌고 하더라도, 그놈의 스마트폰은 화장실에서도 침실에서도, 식사할 때도 항상 손에 들려있었다. 징그럽게도 더러운 행동임에도, 눈치를 채지 못했을까?
아침에 샤워를 하려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켜고, 샤워를 마치고 스마트폰의 음악을 끈다. 씻기 전에 만졌던 물건을 씻고 나서 다시 만진다.
정말 어쩌다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화장실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그 짧은 몇 분의 지루함을 단 1분도 견디지 못해, 손이 떨리는 중독자처럼, 스마트폰을 쥐어 잡는다.
오늘 카페를 갔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카페에 앉아 있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한가할 거라고 생각한 카페는 자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마주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의 시선을 보지 않고, 각자 OLED 액정을 바라본다. 나의 맞은편에는, 엄마와 아들이 와 있었다. 아들은 유튜브에서 게임하는 방송을 보는 듯했고, 엄마는 인스타그램으로 친구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내가 카페에 있던 시간은 2시간이었는데, 그 모자는 2시간 내내 아무 말 없이, 서로의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물론 그들의 사정을 모르고서 편견을 갖는 것은 나쁠 수도 있다. 아웃백에서 아이에게 뽀로로를 틀어주고 허겁지겁 밥을 먹던 어느 '엄마'를 보며, '저렇게 키우는 게 옳은 것일까?' 생각했던 내가, 지금은 아이에게 유튜브를 틀어주지 않고서는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외식 한 번 힘든 '엄마들'을 공감하게 됐다.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물론, 그런 사정일 수도 있지만, 그 카페 내에서 너무나도 절대다수가, 마주 앉아, 핸드폰을 말없이 바라봤다.
스마트폰은 정말로 '스마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세상에 존재를 알린 지 10년이 조금 지나는데, 벌써 인간을 노예화시켰다.
예전에는 빈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불과 10년 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무조건 '맹'하게 기다렸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웠을까?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그냥 '사색'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사색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따진다'라고 되어 있다.
'깊이 생각하다.', '가만히 깊이 생각할 시간'... 나에게 그런 시간은 얼마나 있을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낼 때,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흔들리는 나뭇잎을 가만히 쳐다보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그렇게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되는 일상을 가만히 바라 볼 여유도 없다.
어제는 아이들과 와이프와 차로 오름을 갔다. 가만히 차를 대어놓고 보니, 옆에 있는 풍경이 장관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이며, 고요하게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의 날개들이 사색에 잠기게 했다. 아주 짧은 1분의 사색을 마치고서, 스마트폰에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확인한다. 그리고, 평소 사고 싶었던, 기기를 검색하다가, 갑자기 목적지를 매장으로 향했다.
문뜩 정신이 든다.
내가 무언가 홀린 듯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앉아서 갈대와 풍력발전기 날개를 바라보며 하던 사색의 깊이가 깊어지기도 전에, 나는 '스마트'한 스마트폰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었다.
인터넷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인터넷 뉴스는 사색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뉴스를 확인하면, 누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 알 수 없는 기사를 읽고,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여러 생각과 댓글을 읽어버린다. 거기에는 내가 그 정보를 받아들일 준비 따위는 없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터넷 뉴스와는 다르다. 저자의 소개가 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충분한 인지를 하고 들어간다. 그 책을 읽은 이들의 서평을 간단하게 이해하고, 저자가 글을 쓴 목적을 알고 글을 읽게 된다. 다 읽고 난 뒤에는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어놓고, 잠시라도 나의 사색에 잠길 수 있다.
이것을 찾아보고, 다시 저것을 찾아보고 그러다 다시 이것을 찾아보고...
너무나 정신없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똑똑해지고 있다고 착각한다. 많은 정보를 습득할수록 스마트하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 정보에는 사색이 담기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생각을 나에게 복제했을 뿐, 나의 생각 따위는 없다. 나는 누군가의 생각적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맹목적이고 맹신스러운 정보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다.
예전 어린 시절 친구들과 불장난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양초에 붙어 있는 초에 손바닥을 대고 1초 정도는 있어도 괜찮았다. 그 장면이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시간을 1시간으로 두었다면, 아마 그 손바닥은 지글지글 고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비슷하게도, 군대 있을 적에 바짝 마른걸레를 빨기 위해 화장실에 간 적이 있다. 당시에 빳빳하게 말라 있는 걸레에 차가운 물을 '쏴아' 하고 부었다. 아주 빠르게 뿌린 물은, 걸레에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나는 사색이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맑은 스펀지에 빨간색 잉크를 떨어뜨리고서 스펀지가 빨갛게 되길 바란다면, 빨간색 잉크를 빠르게 많이 쏟아부을 것이 아니라, 천천히 쏟아붓고, 잘 스며들길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 하루를 보내고, 그것이 나에게 스며들길 차분하게 기다리지 않고, 다음 하루를 또 맞이하고, 방금 본 뉴스를 제대로 사색하지 않고, 관련 검색어를 통해 다음 정보를 또 받아들인다.
나는 나로 살고 있는 걸까? 사색을 지루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