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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Dec 20. 202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빠,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 

오랜만에 아주 길고 단 낮잠을 잤다. 


잠이 덜 깼을 때의 달콤함과 몽롱함을 떨치는데  커피만한 것이 없다.  부스스 일어나 커피 포터에 물을 올렸고 선반 위 쿠키 박스에서 과자 2봉지도 꺼냈다. 잠이 덜 깬 탓인지 생각이 날 듯 말 듯 아련한 꿈 때문인지 몹시 허전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낮잠. 커피. 그리고 달콤한 쿠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에 이보다 완벽한 조건은 없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몇 번 도전했음에도 정작 제대로 읽지 못한 이 소설을 나는 호기롭게 펼쳐들었다가 중간에 덮은 경험이 몇 번 있다. 아무려나 소설 속 주인공은 따뜻한 홍차 한 잔과 함께 마들렌 과자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깊은 망각 속에 수십 년 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어린 시절이 눈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마르셀 프루스트, 김희영 옮김, 민음사    



삶이 후회되는 순간, 혹은 행복했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지 이런 류의 타임슬립(time slip) 장치는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높은 건물에서 떨어져 머리를 부딪친다거나 때론 옷장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기도 한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지만 누구나 그런 생각은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머신,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나의 아빠는 언제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아빠가 돌아가신 후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의 40대 시절 사진 몇 장을 보게 되었다. 가정이 있는 중년의 남자에게 40대는 어떤 시절일까? 슬슬 돈이 좀 벌리긴 해도 나가는 곳도 가장 많을 때일 것이고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있으니 어깨에 힘도 잔뜩 들어가는 시기일 것이다. 1980년대를 살아가던 40대이자 가장인 아빠에게는 집에 돌아오면 그의 손에 뭔가 든 것이 없는지 확인하는 젊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었다. 택시 드라이버인 아빠는 영업을 마치면 꼭 무언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장 골목에 위치한 ‘맛나당’ 이라는 빵집에서 팥빵과 소보로빵, 혹은 밤 앙금이 든 생 도넛을 한 봉지 가득 사오곤 했다. 운이 좋아 장거리 손님이라도 태운 날이면 아빠는 기름에 튀긴 통닭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들어와 엄마에게 쓱 내밀었다. 그건 치킨이 아니라 통닭이었다. 자르지 않고 통째로 튀겨진 온전한 한 마리의 튀김 닭, 그런 날 아빠의 어깨는 한 뼘 더 으쓱했을 것이다.     

<종이봉투에 담긴 온전한 한 마리의 통닭>  



다만 원래 꿈이 택시드라이버가 아닌 탓에 아빠는 술이 거하게 취한 날이면 비틀거리며 들어와 식구들에게 

고함을 치기도 했다. 주로 내 인생이 왜 이러느냐! 이런 포효였는데 엄마는 자랑할 것도 없는 인생, 뭘 그

리 큰소리를 치냐는 마음이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술 깨는 약으로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아빠는 별 수 없이 다시 운전대를 잡아야했다. 엄마는 아빠가 또 술을 먹고 돌아오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다. 같은 이유로 자식들은 아빠 엄마가 또 싸우지나 않을까 늘 불안했다.


어떨 땐 우리 집은 이제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상은 별 탈 없이 잘 흘러갔다. 아빠는 다시 퇴근길이면 무언가를 사들고 돌아오고 엄마는 삐죽거리면서도 그것을 받아와 자식들에게 내어주었다. 복날에는 어김없이 아빠의 손에 수박 한 덩이가 들려있었다. 아빠도 엄마도 그 순간은 행복했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 아빠도 그렇게 말했다.      



  - 아빠, 언제가 가장 행복했어요? 

  - 음, 너희들 어릴 때. 우리 식구 다 같이 살 때가 참 좋았지. 

  - 아빠가 밤마다 먹을 걸 사가지고 오셨잖아요. 

  - 그랬지. 자식들 입에 먹을 거 들어가는 거 볼 때가 제일 좋은 거니까.   

     암, 얼마나 좋은 지 말도 못하지!         



투병 기간 1년, 아빠는 사계절을 보내면서 더 이상 예전의 아빠가 아니었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투병의 외로움과 고독함에 아빠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인생의 환희 따위는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이던 아빠의 표정에서 가끔 눈이 반짝 빛날 때가 있다. 내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 오빠가 좀 어떠시냐며 전화를 걸어왔을 때, 저만치서 걸어오는 언니와 나를 발견했을 때 아빠는 잠시나마 반짝 생기가 돌았고 희미하게나마 웃었다. 치명적인 병에 걸려 몸과 마음이 다 쇠하면서도 자식 좋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잠깐이라도 아빠를 보러가는 것, 그 앞에서 웃고 떠들고 졸거나 간식을 먹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동네 지인인 J언니가 하던 일을 그만두고 베트남에서 돌아왔다. 마흔 후반에 한국어 강사 일에 도전한 그녀는 베트남으로 날아갔고, 그곳에서 정착한지 딱 3년째 된 시점이었다. 도전 정신이 강한 J언니는 베트남어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면서 그곳 대학에서 학과장 자리까지 꿰찼다. 결론만 놓고 보면 쉽게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겠지만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옆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가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연을 듣고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가 조금씩 기억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J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무섭고 두려웠다고 했다.      


    " 그 사이 아빠가 떠날까봐 잠을 편히 잘 수 없는 거 있지.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셨다면... 

      아마 난 평생 마음이 편치 않았을 거야."


다행히 보름이라는 시간동안 J언니의 아버지는 잘 버텨주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오랜만에 본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 J언니의 눈가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먹먹해졌다. 기억을 잃어가는 중에도 자식 좋아하는 마음은 본능처럼 남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곁을 떠나기 며칠 전 아빠는 막내가 왔다는 말에 가까스로 눈을 번쩍 뜨고 몇 초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눈조차 뜰 수 없을 만큼 기력이 쇄했는데도 온 힘을 끌어 모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것이 자식이라는 사실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도 가만히 한번 생각을 해봤다. 그런 마지막 순간이 온다면 나도 그러지 않을까?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눈을 떠 사랑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을 것 같다. 아빠는 마지막으로 막내인 나를 똑바로 한 번 쳐다본 후 점차 의식이 희미해져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우리는 아빠의 눈 뜬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내 얼굴 한 번 보겠다고 온 힘을 다해 눈 뜰 사람은 이제 내게는 없다.       


누군가 내게 타임머신을 타고 가서 되돌리고 싶은 시절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각자의 가정을 꾸려 흩어지기 전, 그러니까 원래 우리 식구들끼리  부대끼며 살았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이다. VR이니 AR, 혹은 가상세계에 대한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자신이 돌아가고 싶었던 시간을 설정해 다녀올 수 있는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을까? 물론 아직은 상상만 가능한 일이다. 안타깝지만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아빠는 지나가버린 옛날 사람이 되었으며 나는 이렇게 후회만하고 있다. 타임머신 같은 건 없지만 지금도 나는 가끔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를 바라보던 아빠의 부푼 마음과 기분이 또렷이 느껴진다.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http://naver.me/5YiuzOhl


김경희 / 공명(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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