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외롭게 해서 미안해요
열흘 전쯤부터 큰 태풍이 여러 차례 지나갔다. 그날도 아침부터 날이 잔뜩 흐렸고 뉴스에선 태풍 6호가 지나는 중이라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날씨는 하늘의 기분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 말이 맞는다면 하늘의 기분은 2주째 변화무쌍한 게 틀림없다. 날씨에 꽤 민감한 나는 태풍이 다가오고 지나가는 동안 내내 기분이 들쑥날쑥했다. 태풍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날 아침, 잠든 자식들이 깨어나기를 밤새 꼬박 기다리신 아빠의 호흡이 조금씩 옅어지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우리 남매들은 지난 밤 어쩐지 모두 아빠 곁으로 모여 들었다. 밤늦도록 옛날이야기를 나누었고 막내인 나는 다른 날보다 좀 더 많이 조잘댔다. 아침이 되자 배가 고픈 나머지 크림빵을 흡입하듯 먹어치웠다. 그리고 여유롭게 커피까지 다 마셨을 무렵에야 아빠의 호흡이 점점 더 잦아들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우리는 아빠가 곧 곁을 떠나실 것을 직감했다. 너무 슬픈 일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났으면 죽는다. 당연한 명제인데 죽음을 경험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 상황이 그저 연극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돌아가신 그날부터 지금까지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마음으로 이해가지 않는 것은 단 한 가지다. 사라짐. 방금 전까지 있던 사람이 어떻게 없어질 수 있느냐 이 말이다.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 이토록 지난한데 막상 죽음 이후의 시간이 일사천리로 흘러가는 것도 너무나 이상했다. 죽음은 피해갈 어떤 수단도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가족들이 하라는 대로 입던 옷을 벗고 거울을 봤는데 상복을 입은 내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딱 부모 잃은 모습 그 자체였다. 저녁이 되자 조문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이것이 현실인지 연극인지 나는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것은 인정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아빠의 시신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인사를 할 때 곱게 옷을 갈아입고 반듯하게 누운 아빠는 평소 주무시는 모습 그대로였다. 특유의 코 고는 소리만 들리지 않을 뿐 어릴 때부터 늘 보고 자랐고, 한때 너무 싫어하기도 했던 낮잠 주무시는 아빠의 모습 그대로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빠는 늘 대자로 누워계셨다. 다른 집 아빠들과 달리 그에게는 낮잠 타임이 있었다. 은행원이나 회사원인 아빠들은 이 시간에 집에 없다던데, 사춘기가 시작되어 가뜩이나 반항심 가득한 나는 하릴없이 낮잠이나 자는 아빠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는 가슴께에 양 손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낮잠을 주무시곤 했는데 숨을 고를 때 마다 불룩 솟은 배가 올라갔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당시 아빠의 직업은 택시 드라이버였다. 그는 밥 때가 되면 칼 같이 집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마치곤 두어 시간 낮잠 타임을 가졌다. 엄마는 천하 태평한 아빠의 성격을 늘 못 마땅해 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낮잠은 언강생심, 밤잠까지 줄여가며 돈을 버는 아빠들이 대부분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런 아버지들과는 삶에 임하는 태도가 좀 달랐다. 일이란 건 조금만 해야 하는 것이며, 놀 수 있을 때 하루라도 더 노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성실한 개미 형 엄마와 베짱이 형 아빠는 가치관이 다르다보니 싸우는 날이 잦았다.
-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고
언제 남들처럼 집 장만을 하냐고요!
개미 형 엄마의 생활 철학으로 보면 아빠는 무능하고 게으른 한량이자 한심한 가장이었다. 더 자고 싶고 더 놀고 싶었던 아빠는 결론이 빤한 일일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이놈의 집구석’ 운운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곤 했다. 엄마도 진부한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우는 날이 많았다. 내 기억 속 엄마는 부엌에서 울고, 옥상에서도 울었으며, 부업으로 헝겊인형에 눈을 달면서도 눈물을 훔쳤다. 그런 형편이니 딸인 나는 무조건 엄마 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빠가 점점 미워졌다. 한번 밉기 시작하니 아빠가 낮잠 주무시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에는 아빠라는 존재가 내게 불편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우리 사이의 거리감은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닐까?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빠가 집을 비웠고 엄마와 우리 삼남매는 TV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면서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유머 일번지라는 프로그램이었을 거다. 누군가는 모로 누운 채로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바닥에 엎드려 낄낄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아빠가 기척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몇 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기를 거두고 각자의 방으로 스멀스멀 들어갔다. 엄마는 헛기침을 하며 부엌으로 가지 않았을까? 대게 이런 식이었다. 아빠의 등장에 식구들이 흩어져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간 일은 이후로도 종종 일어났다. 어색함 때문이었을까, 민망함 때문이었을까? 아빠는 자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TV 앞을 차지하고 앉아 양말을 벗고 뉴스를 시청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뉴스를 보며 혀를 차기도 했고, 정치인들의 몸싸움 소식에 채널을 휙 돌려버리기도 했다. 나는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면서 아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등이 무척이나 넓었다. 나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지?’
‘아빠는...눈치가 없는 게 아닐까?’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나는 아빠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거의 마흔 살이 넘어갈 때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아버지가 등을 돌리고 앉은 줄 알았는데 그에게 등을 돌린 것은 우리들이었다. 아빠는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 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더 견딜지 확신할 수 없는 어느 날, 병실로 모인 우리에게 아빠는 손으로 편지를 썼다. 목소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착한 우리 아들, 우리 딸,
너무 사랑은 하는데 표현을 못했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랬다.
기력이 다해 겨우겨우 써내려간 손 글씨였다. ‘사랑을’ 하는데도 아닌 ‘사랑은’ 하는데 라는 글씨였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랬다’ 라는 글씨에선 그만 말문이 턱 막혀왔다. 아빠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안쓰럽고 미안하고 어찌할 바모를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지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대충 얼버무린 감정들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 말할걸. 표현할 걸. 아니, 똑똑히 말했어야 하는 거였다. 아빠, 외롭게 해서 미안해요. 라고.
사랑은 했지만 표현 방법을 몰랐던 중년의 아빠는 사춘기 자녀인 우리들과 함께 TV를 보며 웃고 싶었을 것이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었고 보고 배운 적도 없는,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지라 어떻게 하는지 몰랐던 것뿐이다. 가족이란 참 이상하다. 너무 사랑한 나머지 너무 아프게 한다. 2019년 7월의 어느 날, 6호 태풍이 지나간 고요한 아침에 아빠는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