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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Dec 25. 2021

응답하라 수유리 1988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이야기 


우리 가족이 수유리(지금은 수유동 혹은 도봉로)로 이사 온 것은 1980년대 초반이었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당시에는 ‘이리’로 불렸던 지역에서 상경한 나의 부모님은 그 시절에는 산동네였던 미아리, 그러니까 강북구 미아동의 한 월셋방에서 나를 나으셨다. 아빠가 먼저 서울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뒤에 시골에서 태어난 오빠와 언니를 앞세워 엄마도 뒤따라 서울로 이사한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다. (와-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옛날 사람이 된 기분이다) 가끔 나는 오빠와 언니에게 시골 태생인 두 사람과 달리 나는 엄연히 서울 태생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곤 한다.


아빠의 서울 사랑은 내 이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경희(京姬), 그러니까 나는 이름 그대로 서울태생인 뼈 속까지 서울 여자다. 미아리의 셋방을 전전하던 우리 가족의 서울살이는 수유리로 이사 오면서 정착궤도에 올라섰다. 당시 개인택시를 몰던 아빠는 상업은행에서 주택 대출을 끼고 자그마한 마당이 달린 단독주택을 구입했다. 월세를 받아야하니 방 네 개 중 두 개는 세를 내주었는데 우리가 쓸 수 있는 방은 고작 두 개 뿐인 집이었다. 물론 사춘기에 접어든 오빠에겐 자기 방이 떡 하니 주어졌다. 도리 없이 언니와 나는 아빠 엄마와 한 방을 썼다. 마치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덕선이네 집처럼.      




강북 출생인 나는 드라마 속 ‘덕선이’처럼 미아동, 수유동, 쌍문동 인근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IMF로 우리 집이 은행과 다른 사람의 몫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이십 년 동안 줄 곧 그곳에서 성장한 것이다. 당시 서울 외곽의 동네 구조가 다 비슷하듯 우리 집 역시 다세대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골목마다 자리한 구멍가게 앞에는  복합 문화 공간 역할을 하는 평상이 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 평상에서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수다를 떨며 때론 음주가무(?)를 즐겼다. 각각의 집에는 명패를 건 철제 대문과 콘크리트로 만든 쓰레기통이 있었다. 아침이면 학교 가는 아이들로 골목이 분주했고 저녁이면 얼큰하게 취한 아버지들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골목마다 한두 채 있는 2층 양옥집 빼곤 모두가 비슷한 형편으로 살아갔다. 


<드라마 '응답하라1988'(tvn)에 등장하는 엄마들>


그래도 작든 크든 어느 집에나 마당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장독대와 오밀조밀한 화단이 자리했는데 저마다 취향은 달라도 꽃나무 한 그루씩은 심어있었다. 아빠는 마당에 대추나무를 심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처음으로 마련한 집, 대출이 많으면 어떻고 세를 많이 놓아 식구들 머물 방이 부족하면 어떠랴. 그래도 아빠에게는 명패를 단 자신의 집이고 그에겐 희망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은 아빠들의 전성기였을까? 나는 수십 년이 지나서야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82세가 된 아빠와의 인터뷰에서였다.

      

  - 아빠. 서울에서 처음 우리 집을 샀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 아유 좋았지. 말도 못하게 좋았지!

  - 그렇게 좋으셨어요?

  - 진짜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더구나. 그걸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하니?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에 마련한 다섯 식구가 함께 살았던 그 집. 그곳은 인근의 다른 집들과 마찬 가지로 단열이 안 되어 겨울이면 문풍지로 문틈을 매우는 게 일이었다. 그래도 틈새는 있게 마련이라 집은 겨울만 되면 냉장고처럼 몹시 추웠다. 아빠는 거실에 깔아놓은 붉은 카펫 위에 난로를 설치했다. 난로 위에는 은박지에 싼 고구마가 있었고, 야심한 밤이 되면 엄마는 장독대에서 동치미를 꺼내왔다. 




다섯 식구. 그랬다. 우리 다섯 식구는 겨울 밤마다 빙 둘러 앉아 고구마나 삶은 달걀을 살얼음이 낀 동치미와 곁들여 먹었다. 엄마는 달걀 한 판을 한꺼번에 다 삶기도 했는데 그땐 어찌나 식성이 좋았던지  삶은 계란 5-6개 정도는 거뜬히 먹었다.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들은 마지못해 둘러앉아 그저 먹는 데만 몰두했다.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빠와 엄마도 마주 앉아 묵묵히 먹기만 했을 테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별 다를 것 없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날들, 가끔은 그 밤들이 너무 그립다. 우리 다섯 식구끼리만 살았던 그 시절, 매미가 울고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들리던 그 밤들 말이다. 나는 엄마에게도 그때가 기억나는 지 물어본 적이 있다. 물론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다. 엄마에겐 아직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다.   


  - 기억나지 그럼?! 너희들 한창 먹어댈 때라 뭘 해놓기가 아주 무서웠는 걸. 

     으이구. 그때 느이 아빠만 돈을 잘 벌어왔으면 얼마나 좋니? 

     하여간 네 아빠 생각만 하면…….     


엄마는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각자 기억의 순간과 의미가 다르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같은 시간을 공유한 사이라는 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건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고,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시간을 보낸 가족만이 기억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아빠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여전히 불만을 쏟아내는 엄마지만 그래도 그때 이야기할 땐 잠시나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그 순간이 행복인지 몰랐던 그때, 우리 가족> 




기억을 더듬어 보면 왜 그런지 나는 우리 식구가 함께 먹었던 순간들만 떠오른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다녀와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엎드려 간식을 먹고, 저녁이면 구운 고등어나 임연수, 혹은 산더미처럼 쌓인 꼬막을 까먹던 기억들, 늦은 밤 아빠의 개인택시가 골목을 돌아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 엄마는 재빨리 고무 슬리퍼를 꿰어 신고 아빠를 마중 나갔다. 엄마의 손에는 기름으로 흥건하게 젖은 종이봉투 속의 통닭이나 단팥빵, 생 도넛, 찹쌀 꽈배기 같은 것들이 들려 있었다.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또 다시 둥그렇게 모여 앉아 말없이 통닭을, 단팥빵을, 생 도넛과 꽈배기를 먹었다. 어쩌면 눈 뜬 순간부터 지쳐 쓰러져 잠들 때 까지 오로지 먹는 데만 몰두했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그토록 무언가를 열심히 먹은 건 그때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이란 게 모름지기 그런 때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먹고 또 먹는 우리를 흐뭇하게 바라보았을 아빠의 모습이 상상으로 그려진다. 그때 아빠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면 좋았을 걸. 이제 아빠는 사라졌고 엄마는 혼자가 되었으며, 뿔뿔이 흩어진 우리 가족들은 저마다 또 다른 가족을 꾸려서 살고 있다. 누구나 그렇게 사는 거라고 다들 말하던데 나는 여전히 그때가 그립다. 이제 현실에는 없지만 내 무의식 속에는 여전히 그 밤들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우리 다섯 식구는 말없이 밤참을 먹고 있을 것만 같다.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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