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 그리고 나의 첫 영화 '장군의 아들'
내 기준으로 한때 서울의 상징은 종로였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해외여행 자율화 시대가 열리면서 당시 대학생들은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를 필히 가야할 코스처럼 인식했고 그런 이유로 종로에는 어학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곳엔 어학원 말고도 영화관이 존재했다. 당시 젊은이들은 금요일 오후가 되면 으레 모임 장소를 종로로 잡곤 했는데, 주로 종로서적이나 금강제화 건물 앞 혹은 낙원상가 쪽이었다. 주말에도 종로3가역을 빠져나와 약속 장소로 향하는 젊은이들로 종로 일대가 들썩들썩 했다.
떠밀리다. 그래, 인파에 떠밀려 앞으로 나아갔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서로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당시 종로 거리는 그러했다. 거리두기란 존재 하지 않는 세상, 앞사람의 뒤통수를 보며 꾸역꾸역 떠밀려 거리를 활보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던 때였다.
종로의 인파는 아마도 영화관 때문일 공산이 크다. 오랜 세월 서울을 대표해온 영화관 중 하나였던 서울극장과 피카디리 극장, 단성사가 모두 종로에 위치해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서울극장도 2021년 8월 31일 영업을 종료한다니 어째 마음이 좀 씁쓸하다. 여전히 서울에서 살아가거나 나처럼 한 때 서울에 오래 살았던 이들에 추억의 장소인 종로3가의 극장들은 이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었을 종로3가 극장의 추억, 벌써 30년이 지난 일이지만 너무 생생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내게도 있다. 1990년 6월 이른 여름, 아빠가 가족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이야기했다.
보통의 가족이라면 아버지의 영화 관람을 제안을 기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집은 상황이 좀 달랐다. 아빠를 제외한 나머지 네 식구는 그 제안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식구 5명이 영화 관람을 하려면 대강 얼마를 써야하는지 계산이 선 엄마는 경제적인 이유로 탐탁지 않아했다. 각각 대학생과 고등학생이던 오빠와 언니는 평소 원활한 소통 없는 우리 가족의 나들이가 불편할 것이 빤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겨우 14살이었다. 본격적인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니 가족과 함께 극장에 간다는 것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가족끼리 왜 그래? 우리는 그야말로 동상이몽 가족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눈치가 없는 건지, 알면서도 그러시는 건지(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후자에 속함) 주말 영화 관람과 가족나들이를 강행했다. 게다가 아빠가 제안한 영화는 함께 볼만한 것도 아닌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이었다.
<장군의 아들>이 어떤 영화인가. 1990년 6월 개봉한 그 영화는 1930년대 종로 우미관 일대에서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액션 영화다. 단성사에서 6개월간 상영하면서 서울에서만 무려 관객 60만명을 동원한 이 영화는 당시 엄청난 경쟁률의 오디션을 뚫고 발탁된 배우 박상민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히트작이다. 이 영화의 등급은 청불은 아니었지만 15세 이상 관람가 영화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 14세인 나는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화인 것이다.
사실 나는 친구들이 학교로 가져온 영화잡지에서 ‘장군의 아들’에 대한 칼럼도 읽은 터였다. ‘박상민, 방은희 파격 베드신’ 같은 야릇한 문구도 떠올랐다. 1990년이면 내가 20대 때 한 호도 빼먹지 않고 구입해 읽던 ‘씨네21’이 창간되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영화잡지 ‘로드쇼’ 나 ‘스크린’이 아니었을까?
아무려나 나는 영화의 수위(?)에 대해 아빠에게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내심 고민하다가 끝내 말하지 못했다. 아빠의 표정이 등급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기대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가족은 각자의 불편함과 어색함, 짜증을 가득 안고 다가온 주말 종로3가로 향했다. 오직 웃고 있는 사람은 아빠뿐이었다.
흥행 영화답게 매표소 앞은 줄이 꽤 길었다. 6월의 이른 더위 속에서 긴 줄을 참고 기다리려니 조금 짜증도 났다. 이윽고 대기가 줄어들어 우리 가족도 매표소 창구 앞에 다다랐다. 대략 30분 전부터 나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혹시 몰라 ‘저는 열다섯입니다’ 라는 대답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가족의 차례가 왔다. 언제나 그렇듯 아빠가 나섰다.
매표소의 투명 아크릴 칸막이 너머로 우리 가족을 훑어보던 직원은 손으로 숫자를 세다가 문득 나를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런지 무수히 연습했던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빠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나는 순식간에 귀부터 빨개졌다. 마치 몹쓸 범죄에 동원된 공범자가 된 듯 이상한 기분마저 들었다. 매표소 직원은 나를 한 번 더 휙 훑어보더니 <장군의 아들>이라고 인쇄 된 영화 표 5장을 아빠에게 내밀었다. 갑자기 더워진 6월의 날씨 때문인지, 아빠의 거짓말 때문인지 영화관 나들이라고 나름 골라입은 모자 달린 티셔츠의 등까지 흠뻑 젖어 몸에 들러붙었다.
아빠는 영화표를 들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몹시 불쾌하고 끈끈하고 이상한 감정을 느끼며 우리 네 식구는 저만치 성큼성큼 걸어가는 아빠를 따라갔다. 그는 단성사 앞에 위치한 다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화 시작 전까지 한 시간 가량 여유가 있었고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다방에 마주 앉아서 음료를 주문했다.
밥도 아닌 음료 따위에 돈을 쓰는 아빠를 엄마는 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쳐다보았을 거고, 대학생인 오빠는 오빠대로, 고등학생인 언니는 언니대로, 고등학생인 척을 해야 하는 나는 나대로 영화 관람하기 전부터 기운이 쫙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우리 가족이 무슨 음료를 시켰는지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기억나는 건 아빠가 막내인 나를 위해 따로 주문해준 요구르트였다. 극장 앞 다방에서 맛본 요구르트의 맛은 시큼하고 달달했다.
옛날 말로 시간은 쏜 화살 같다더니 30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얼마 전 종로에 나갈 일어 그곳으로 향했는데 종로3가역을 빠져나가면서 나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친구인 방송작가와 함께였는데 텅 빈 종로 거리를 보고 있자니 그야말로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종로는 예전의 종로가 아니었다. 극장은 하나 둘 사라진 뒤였고 발 디딜 틈이 젊은이들이 몰려들던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휑했다. 1층 가게는 임대로 내놓은 곳도 상당했다. 과거 시간들이 통째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 괜스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나는 ‘단성사’가 있던 자리에도 들러보았다. 물론 영화관도 요구르트를 팔던 다방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모든 것이 변해버린 거리에 잠시 서서 30년 전 그때를 떠올려본다. 가족이 함께 당시로는 파격적인 베드신이 있던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던 시간들과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던 기억, 시큼하고 달달한 요구르트의 맛까지 말이다. 영화를 다보고 그날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뭔가 화가 잔뜩 난 채 우걱우걱 밥을 입에 밀어 넣으며 속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돌아보니 나는 그렇게라도 함께 영화를 보고 싶었던 아빠의 마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는 어려서 그랬지만 어지간히 나이를 먹은 후에도 나는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못했다. 언제나 나 자신만 최고였고 내 상황만 중요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 영화는 우리 가족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본 극장 영화로 남았다. 이런 까닭으로 경계를 넘었던 그날의 기억은 내 인생 최고의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었다.
앞으로 그 누가 나를 데리고 인생의 경계를 넘는 경험을 시켜줄까? 그런 사람은 이제 다신 없을 것이다.
불편한 사람은 역시 인생에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