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희 Jan 03. 2022

가출의 추억

안녕 부산, 안녕 나의 소녀시대! 

나에게는 가출의 흑 역사가 있다. 열아홉 살 겨울이었다. 


대입 시험을 보고난 직후였는데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고교시절 내내 불만에 가득 차있었다.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기 힘들어 하던 나는 하루는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기기도 했다. ‘마치 사과 궤짝에서 썩어가는 짓물러진 과일 같은 기분이야’ 라고.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모르면서 감히  이렇게는 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마침내(겁도 없이) 가출을 감행할  결심을 하곤 서울역으로 향했다. 


경부선 하행선, 그러니까 밤기차를 타고 도망가려는 곳은 부산이었다. 대체 왜 부산이었냐고?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한번쯤 그럴 때가 있는 것 아닐까. 선우정아의 노래 ‘도망가자’처럼 그런 마음이 드는 때가 누구나 있다. 어디든 가야할 것만 같은 그런 때 말이다. 


아무려나 밤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속에선 묘한 쾌감 이 일어났다. 그 사이 기차가 천천히 플랫폼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문득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보았는데 왜 그런지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일탈을 해도 되나? 싶은 마음도 들었고 다신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것도 걱정되었다. 일로 가끔 만나는 한 선배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김 작가는 한 번도 일탈을 해보지 않았을 것 같아. 

       모범생이었지? 그렇지?


그런데 생긴 것과 달리 나는 한번 마음을 먹으면 갈 데까지 가보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가출은 열아홉 살 겨울 밤, 그렇게 시작되었다.      




기차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달려 도착한 시간은 새벽 5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결정적 장면은 부산역 앞의 아스라한 풍경이다. 가파른 비탈 길 아래로 비둘기 떼가 무리지어 있었고 갈팡질팡하며 주변을 서성거리는 새들을 보니 나와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새벽 시간이었는데도 어디선가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모래시계 OST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음악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부산이라는 도시에 첫발을 내딛었다. 


경부선 종착역 <부산>
<부산에 가면 너를 만날 수 있을까, 달맞이길>


서울 집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을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찌 그리 당돌할 수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무작정 발 디딘 그곳 부산에서 나는 정확히 보름을 살았다. 서면 인근의 레코드 가게에 이력서를 제출해 취직을 했고, 부전시장 근처에 월세 방도 얻었다. 쌀도 한 봉지 샀고, 라면과 참치 같은 것들도 구입했다. 집을 나가서 새로운 집을 얻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철이 없다는 건 아마도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하지만 나는 철이 없는 시절이야 말로 방황을 좀 해봐도 좋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선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인생에서 몇 번 쯤은 말이다.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는 거니까. 


내가 집을 나간 데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우선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즈음 암 투병 중인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머무셨는데 새벽마다 고통으로 신음하는 할머니를 바라보는 것이 나로서는 몹시 힘들었다. 지금이야 그게 무슨 집을 나갈 이유가 되나 싶지만 철이 없는 곤란한 인간이다 보니 당시엔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학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다. 공부에 취미가 없을 뿐 더러 미용을 배우겠다는 나의 의견을 가볍게 무시하는 아빠에게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나는 절대로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기 시작했고 아빠는 난생처음 내게 회초리를 드셨다. 쩍. 나무 회초리가 양쪽 종아리를 스치는데 솔직히 몹시 아팠다. 아빠는 ‘대학에 가겠습니다!’ 라는 말이 나올 때 까지 종아리를 때릴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은근히 고집이 센 편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대로 한번 비뚤어지면 갈 데까지 가보는 성향을 가진 아이였다. 쩍. 쩍. 종아리에 여러 줄이 그려지고 있었지만 나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두 어 시간 동안 든 회초리를 던지고 아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나는 내심 이겼다는 생각을 하며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집을 나가리라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졸업식이 다가올 즈음 부산 행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가출 후 보름이 지났다. 서면 시장 레코드 가게에서 일을 하던 중 문제가 생겼는데 내가 그만 실신을 하고 만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몸이 약해서 먹던 약이 있었는데 그걸 챙겨가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어리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한가? 


가출을 하려면 계획이 있어야 하는데 약도 챙기지 않고 가진 돈도 얼마 없이 나는 무모하게 가방 하나만 둘러맨 채 집을 나간 것이다. 레코드 가게에서는 매일 같이 드라마 모래시게 삽입곡이 흘러나왔고, 나는 인생은 원래 비장한 거야, 라고 곱씹으며 LP판 진열대의 먼지를 털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정확히 보름 후 나는 비쩍 마른 몸을 하고선 패잔병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그토록 꼴도 보기 싫던 집인데 막상 돌아오니 휴- 이제 살았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잃어보기 전에는 소중함을 모른다. 집을 나가보니 나는 다시 집이 좋아진 것이다. 


그 사이 아빠와 엄마는 언제 돌아올지 모를 딸의 대학 등록금을 내 놓으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19살이던 내가 마흔 살이 넘어선 지금까지 아빠나 엄마 누구도 내게 당시의 일에 대해 묻지 않으셨다. 가출사건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빠와의 인터뷰에서였다. 나는 이십년도 훌쩍 지난 그 일을 아빠에게 묻고 싶었다.      


  - 아빠, 저 집나갔을 때 기억나세요?

  - 응? 기억이야 나지.

  - 그때 어떠셨어요? 한 번도 그 이야기 꺼낸 적 없으시잖아요. 

  - 아휴……. 그땐 뭐…… 다시는 우리 딸 못 보는 줄 알았지. 

     지금에야 하는 이야기지만 아침에 눈 뜨자마자 지하철 노선도를 놓고 

     하루씩 다른 역에 가보고...또 가보고...그랬다. 

     어제는 서울역, 오늘은 명동역……그렇게 말이다.      


그건 내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빠에게 다시 물었다.     


  - 서울 시내 지하철역을 다 돌아다니셨어요? 왜요?  

  - 혹시라도 우리 딸이 지나갈까 싶어서 

     그러다 너랑 비슷한 아이만 봐도 심장이 아주 그냥…….

  - ......

  - 하하하! 그만두자. 다 지난 일인데 뭐.     


나는 수십 년이 지나도록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아빠가 나를 찾아 지하철역을 헤매고 다닌 줄도 몰랐고 다시는 딸을 못 볼까봐 그토록 마음을 졸인 것도 알지 못했다. 자식이 속 썩이는 데는 쓸 약도 없다. 그저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도 묵묵히 기다리고 견디는 것 뿐 달리 방법이 없다. 나는 얼마나 키우기 힘든 자식이었던가? 

그리고 아빠는 내게 왜 한 번도 묻지 않으셨을까?      


     왔으니까 됐어. 돌아왔으니까 이제 된 거야……그렇게 생각했어.




요즘도 출장길에 오를 때 나는 종종 경부선 기차를 탄다. 그럴 때 마다 집을 벗어나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던 열아홉 살의 내가 떠올라 마음이 뭉클해진다. 그런데 요즘은 어딜 가도 자꾸만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서울역 계단을 오를 때, 명동 역 플랫폼을 빠져나갈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신사를 보면 나는 어김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모르는 분들이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본다. 


한번은 기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 앉아있는데 저만치에서 한 노인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분은 아빠가 투병하는 내내 입고 있던 체크무늬 후리스를 옷 안에 받쳐 입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실내복인 그 옷을 아빠는 세탁할 때 빼고는 투병 내내 입으셨다. 


아빠는 그 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거나 살곰살곰 움직이며 집안을 걸어 다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 내 딸 왔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빠의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빠가 입었던 그 옷과 비슷한 옷을 입은 노인들이 나를 지나쳐 사라질 때 까지 나는 한참동안 그분들을 바라본다. 그럴 땐 마치 내가 공터가 된 기분이 든다. 


내가 집을 나갔을 때 아빠도 그런 기분이 이었겠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빠에게 이 이야기를 한다면 그는 기쁠까, 아니면 슬플까? 안타깝게도 질문이 가 닿을 방법이 없다. 이상한 슬픔이다.         



<묻지 않아서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http://naver.me/5YiuzOhl



김경희 / 공명(2021. 11. 25)


이전 06화 종로에 가면 그 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