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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11. 2022

유전의 비밀1

나에게는 건달의 피가 흐른다

지금보다 철은 좀 없고 에너지는 넘치던 몇 년 전,


아이 유치원 친구 엄마인 Y와 나는  맛 집이라면 어디든 찾아갈 기세로 쏘다닌 적이 있다. 한번은 굳이 한강 다리까지 건너 빵과 커피를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지금처럼 SNS 정보가 넘치던 시절도 아니었는데 그녀나 나나 둘 다 그런데는 정보가 빠삭했다. 그렇다고 거하게 고기를 먹으러 가거나 화려한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도 아니었다. Y와 내가 꽂힌 것은 오로지 빵과 커피였다.


나는 그것이 우아하게 사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아직 서른다섯이었고 아이들이 어려서 육아 스트레스를 대체할 뭔가 확실하고 소소한 행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느 봄 날, 서울에서 빵이 제일 맛있기로 소문난 곳을 찾아낸 우리는 만나자마자 의기투합하여 차를 몰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한강을 건너다가 길을 잘 못 들어 잠시 우회를 했고 둘 다 자기가 옳다고 우기며 길을 꺾다가 싸움 비슷한 걸 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녀와 내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을 거다.


     아! 어서 도착해 그토록 맛있다는 빵과 커피를 먹고 싶다!     




아니나 다를까, 매장에 진열된 빵들은 확실히 고급스러웠고 갓 내린 커피는 두말할 것도 없이 향긋했다. 그릇 좀 사본 사람은 누구나 알만한 품격있는 접시에 담긴 빵과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마치 프랑스에라도 와 있는 듯 붕 뜬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어느새 아이들이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졌다. 확인해보니 Y와 내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먼저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가정주부인 그녀보다 프리랜서이긴 하지만 돈 버는 사람이 쓰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꽤 친절해 보이는 점원이 상냥하게 말했다.

     

  - 오만 팔 천 원입니다.

  - 네? 저희는 커피 두 잔과 빵 두 개,

    그리고 조각 케이크 하나 밖에 안 먹었는데요?

  - 네, 맞습니다.

  - …….     


그러니까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빵과 커피 두어 잔을 한 시간 동안 먹었을 뿐인데 순식간에 육만 원 돈이 나가게 된 셈이었다. 나는 살짝 머리가 핑 돌았지만 그 정도는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삼 개월로 해주세요.”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Y가 먼저 차를 빼고 저만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경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 거기 비싸지? 내가 살 걸 그랬다.

   - 아냐. 그 까짓 빵 값, 돈 벌어 뭐해? 내가 얼마든지 쏜다!

   - 아유! 돈 버는 워킹 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니?


Y가 기분 좋게 콧노래를 부르며 시동을 걸었다. 방금 전 그녀에게 큰소리 뻥뻥 치는 내 모습에서 나는 얼핏 아빠의 모습을 봤다. 오랜세월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빠의 그 모습 말이다.




전라도 익산에서 주먹으로 가장 유명했던 아빠는 돈이 생겨도 곧장 집으로 가져오는 일이 없었다. 아빠가 가장 먼저 한일은 주먹 계 동생들을 다방으로 데려가 도라지 위스키 한 잔씩을 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새댁이던 엄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하소연했지만 아빠가 뒤돌아보며 남긴 말은 코믹하면서도 몹시 비장했다.


    - 건달은 그렇게 사는 거 아니야.

       독에 쌀이 떨어져도 고기 먹은 사람처럼 이쑤시개를 물고 다녀야하지.  


그것은 아빠의 건달 철학이었다. 모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폼)가 없냐’라는 것과도 같은 맥락의 말이다. 또 다른 말로는 폼생폼사,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멋을 최우선 순위로 두는 삶의 태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 생활 방식이나 태도로 인해 고생하는 엄마를 지켜봐온 나로서는 아빠를 좋게 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서른 중반을 넘기고 마흔이 넘어갈 무렵부터 내 모습에서 아빠가 보였다.


나는 종종 힘들게 번 돈을 쉽게 썼고 때론 흥청망청 써버리는 탕진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무래도 내 몸 속에 건달의 피가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방송 작가라고 하면 돈을 쉽게, 혹은 많이 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도 아니고 예능 작가도 아닌 다큐멘터리 작가의 돈벌이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 방송 작가로 1억 벌기에 관한 책을 쓴 후배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100%는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1억을 벌수는 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1억을 벌려면 몸과 마음이 부서져야 하고, 위장이 뒤틀려야 하며 막내 작가나 팀원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일을 떠넘겨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다큐멘터리 작가로 큰돈을 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다큐 작업이 보통은 몇 개월에서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하는 일이라 막상 계산해 보면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일이 있다는 것,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내 한 몸 간수할 정도의 벌이는 된다는 점이다.


물론 그 돈의 일부를 나는 늘 빵과 커피, 혹은 맥주를 먹고 마시는 데 돈을 쓴다. 스트레스 받는 일이 많지만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을 즐기는 것도 아니며 명품을 사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저 일상에서 수시로 자주 행복한 세계를 맛보는 것이 좋을 뿐이다.


건달의 음료, 커피와 맥주


이런 세상을,

가끔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이런 세상을 살아가려면

아름답고 우아한,

혹은 허영이 가득한 건달과 한량의 정신이 필요한 것 아닐까?


통장의 잔고는 늘 아슬아슬하지만 나는 이 호사스러운 건달 생활을 청산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엄마가 알면 까무러치겠지만 나는 아빠에 버금가는 건달의 아이콘이 될지도 모르겠다.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http://naver.me/5YiuzOhl



김경희 / 공명(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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