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싸움꾼의 피가 흐른다
유감스럽게도 주변에서는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지만, 사실 나는 한때 싸움의 달인이었다.
물론 이십대를 지나 서른을 넘어서고 마흔에 접어들면서 나는 꽤나 괴팍한 그 성질을 내려놓았다. 그래선지 의외로 가까운 사람들이 내 얼빠진 얼굴이나 어리바리한 행동을 보며 뭐든 무난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일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꽤나 까칠한 편) 실제로 사십대에 접어들면서 부터 나는 거의 싸움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다 최근 내 몸에 흐르는 싸움꾼의 피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 있었다.
그 대상은 공중파 방송국의 한 꼰대CP와의 설전이었다.
방송 일을 20년 가까이 하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본사 피디의 이른바 ‘갑질’이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간혹 그런 CP가 걸리면 그야말로 똥 밟는 경우로 치닫게 되기 때문이다. 방송국과 외주제작사의 계약서 자체가 갑과 을로 되어있다 보니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닌 일개 병인 프리랜서 피디와 작가의 입장은 철저히 무시되기 일쑤다. 어떤 사람들은 실력보다 CP의 비위를 잘 맞추는 것이 곧 능력이 되기도 했다. 싫은 내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나는 본사 부장님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문제의 그 사건은 두어 달 전 벌어졌다. 모 방송국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CP가 성질이 사납기로(더럽기로) 꽤 유명한 사람이 걸린 것이다. 중간에 제작진을 바꾸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첫 미팅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두 번째 제작회의를 하는데 그날 일이 벌어졌다. CP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내 구성안을 들고 이렇다 저렇다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 김 작가, 방송 하루 이틀 해?
이건 뭐 취재가 뭐 하나도 안 되었잖아, 응?
- 어디가 안 되었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세요.
- 아니, 그러니까…….
- 이제 자료 조사 중이고요, 취재는 걸어놓은 상황이니 좀 기다려봐야 하는데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죠?
- 아니, 김 작가! 원래 그렇게 한 마디를 안 지나?
- 제가 왜 한 마디를 져야 하죠?
- 하! 진짜 예의 없는 작가구만?
- 먼저 예의를 갖추세요, 부장님.
CP는 질색하는 얼굴을 지어보이더니, 갑자기 근엄한 표정으로 책상을 한번 ‘쾅’ 내리쳤다. 전형적인 꼰대였다. 보통은 그런 경우 기가 죽는 모양인데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가 내려친 것보다 조금 더 큰 강도로 책상을 내리쳤다.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어보지 않았는지 CP가 잠시 당황하더니 갑자기 내게 ‘꽥’ 하며 소리를 질렀다.
- 이봐요! 지금 뭐하자는 겁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냐 이 말이다. 어디선가 뜨거운 무엇이 치고 올라오더니 급기야 나는 그가 내지른 소리보다 두어 배쯤 더 큰 소리로 버럭 고함을 쳤다.
- 지금 그쪽은 뭐 하자는 겁니꽈!!!
언뜻 듣기로 뭐 이런 작가가 다 있냐는 소리도 들렸고, 살다 살다 CP에게 대드는 외주 작가는 처음 봤다며 그는 아예 질색을 했다. 함께 회의에 들어갔던 피디는 가운데서 안절부절했다. 그와 나는 삼십분 간 피만 튀기지 않을 뿐 전쟁 같은 설전을 벌였고 먼저 실언을 한 건 CP였기에 결국 나는 사과를 받아냈다. 변명에 지나지 않는 사과라 불쾌함만 더했지만.
- 미안합니다. 그저 기선제압하려 했을 뿐이에요.
나는 그의 태도에 기가차서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기선제압을 위해 외주 제작진들에게 폭언을 휘둘렀다는 거 아닌가? 함께 있던 피디가 말리는 바람에 더는 싸우지 못하고 나왔지만 집에 돌아온 뒤로 내내 찜찜함을 숨길 수 없었다. 역시나 CP는 프로그램이 끝날 때 까지 은근히 나를 괴롭혔고, 급기야는 방송시간 2시간을 남기고 테이프를 넘길 만큼 제작진의 속을 썩였다. 이른바 태움이었다. 방송을 앞두고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는 ‘살다 살다 이런 여자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이런 여자라니, 대체 그건 어떤 여자라는 것일까?
1990년대 말 대학 졸업 후 L백화점에 입사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똑같은 말을 듣고 퇴사를 한 적이 있다. 회사 생활 2년차였는데 당시 나는 날마다 퇴사를 고민하곤 했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백화점 8층 카드센터에서 근무하던 평범한 여직원 중 하나였던 나는 가뜩이나 센터장인 부장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름만 센터장일뿐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유니폼을 입은 여덟 명의 여직원들 뒤에 놓인 거대한 책상 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거나 야한 영화를 보는 일이 전부였다. 게다가 그는 야한 영화를 보는데 볼륨을 끄지 않고 보는 날이 잦았다. 여직원들 대표로 나는 문제를 제기했고 그는 깜박했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 아이쿠! 내가 이렇게 정신이 없다니까.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적으로 저질렀다. 가만 지켜보니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인 것이 분명했다. 여직원들은 회의를 했고 다함께 들고 일어나 부장의 고의적인 실수에 대한 책임을 묻기로 했다. 확실한 성과를 위해 마침 인사과에서 점검을 나왔을 때 그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꺼내기로 입까지 맞췄다.
며칠 후 결전의 날이 왔다. 내가 먼저 일어나 부장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 여직원들도 따라서 한마디씩 거들기로 했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기다리던 그날 아침,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부장과 내통하는 누군가가 있었던 건지, 인사과 직원들이 도착하자마자 부장이 먼저 근무태도가 불량한 직원으로 나를 지목한 것이다. 노름판의 타짜처럼 부장이 먼저 선수를 친 거였다.
- 하! 부장님이 제 근무 태도를 논할 입장이 되세요?
- 김경희 씨, 당신이 얼마나 고객 응대 점수가 형편없는지 알아요?
당신 때문에 컴플레인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아냐고!
- 저 고객에게 성심을 다했어요.
뒤에서 컴퓨터로 고스톱이나 치는 분이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 뭐? 야!
- 야? 지금 야! 라고 했어요? 이 인간이 미쳤나 진짜?
- 뭐 인간? 어디 평사원이 감히 부장한테……. 이거 완전 또라이 아냐?
- 뭐? 또라이요?
카드센터 매장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부장과 설전을 벌이다 그만 몸싸움까지 했다. 부장이 먼저 나를 밀쳤고 나는 넥타이를 맨 그의 멱살을 잡기에 이르렀다. 90년대만 해도 직장 내에서 남직원의 권위가 여직원보다 높던 시대라 다들 아연실색해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일로 부장과 나는 인사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간 이는 부장이 아닌 나였다. 상사에게 막말한 걸 사과하라는 경고를 들었는데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직서를 내러 갔는데 부장이 내게 부드러운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면 어때?
이렇게 퇴사하기엔 김경희씨는 너무 아까운 재목이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이었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어보이곤 부장 얼굴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때 들었던 말이 바로 그거다. 20년 후 다시 듣게 될 그 말,
- 어휴!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
사직서를 던지고 문을 쾅 닫고 나오는데 가슴이 후련하면서도 몹시 씁쓸했다. 그리고 1년 뒤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있던 친구가 부장이 승진을 해서 모 백화점의 점장으로 갔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속이 상하다기 보다는 그런 조직을 빨리 빠져나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아빠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청년이었다. 성공하기 전에는 고향에 가고 싶지 않아하던 아빠가 어쩔 수 없이 한번 내려갈 때마다 동네 사람들은 아빠의 옛날 모습을 이렇게 추억했다.
- 싸움하면 이길 사람이 없었지 근방에서.
오죽하면 너희 아빠 지나가면 풀잎도 미리 드러눕는다고 했겠어?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 사장님의 증언이었다. 한번은 타 지역에서 아빠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싸움꾼이 결투를 신청했는데 그 장소가 중국집 홀이었다고 했다. 화교 사장님은 그날 아빠의 날쌘 동작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한번 상상을 해봤다.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는 거라 중국집 홀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일대일로 펼쳐지는 싸움꾼들의 결투, 상상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드라마 야인시대를 참고할 수밖에 없지만 아무쪼록 맨 주먹으로 싸우는 그 시절의 싸움은 어느 정도는 낭만적이긴 하다. 나는 인터뷰 당시 아빠에게 이렇게 물었다.
- 아빠, 주먹으론 당해낼 사람이 없었다면서요?
- 하하. 주먹을 함부로 놀리면 그건 깡패지.
진짜 싸움꾼은 함부로 싸우진 않아.
- 그럼 어떻게 해요?
- 눈빛으로 기선을 제압을 하지.
- 그래도 안 되면요?
- 그땐 뭐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빠지는 거지.
아빠가 자주 했던 말 중 하나가 싸움의 정도(正道)였다. 함부로 싸움을 해도 안 되지만, 저항을 해야 할 땐 분노하고 싸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빠는 그런 이야기를 아들이 오빠에게만 한 것이 아니라 딸에게도 똑같이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우리 집에는 남녀 차별도 없었다. 아빠는 아들과 딸을 늘 공정하게 대했고, 딸인 내게도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이십 년 전에도 이십 년 후에도 나는 이런 여자, 저런 여자, 라는 말을 듣곤 하지만 분노하고 저항하는 건 민주주의의 기본 아닌가? 세상이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곳곳에 찌질한 꼰대들이 널려 있고 어디서든 불합리한 상황들은 존재하니까. 마흔을 넘긴 지금의 나는 웬만하면 잘 싸우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도 분노하고 저항해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피 터지게 싸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