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모든 딸들의 첫사랑이다
마흔 중반이 훌쩍 넘은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며 훌쩍 베트남으로 날아간 J언니가 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J언니는 어찌나 계획적이고 도전적이며 진취적인지 한국어문화원 강사 자리 제안을 받자마자 곧장 베트남으로 향했다.
J언니에겐 아직 대학생인 둘째를 포함해 20대가 된 아들 둘이 있었지만, 그녀는 자식과 자신의 미래를 별개로 생각하는 스타일이라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맘때쯤엔 젖은 낙엽처럼 들러붙고 만다는 남편도 없어 홀가분한 상태라 그녀의 베트남 행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베트남어를 한 마디로 할 줄 모르는 상태였다는 거다. 허덕거리며 육아와 일에 치여 사는 나에게 그녀의 가출(?)은 마치 집나간 로라처럼 통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오십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독립을 꿋꿋이 진행시키는 그녀를 보며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는데, 역시나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진짜 독립이라는 점이다.
성실한 사람들의 시계는 다른 속도로 흐르는지 늘 그만그만한 나와 달리 베트남으로 날아간 J언니는 하노이에 위치한 한 대학교에 강사 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한국 탈출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다시 1년 만에 한국어과 교수가 되더니, 급기야 그녀는 한국어학과 학과장 자리까지 올라갔다. 2년 만에 방학을 맞아 한국을 잠시 찾은 그녀에게 나는 이렇게 물었다.
- 3년 만에 베트남 대학교에서 학과장이 된 걸 내가 어떻게 납득해야 해?
- 운이 좋았어. 마침 하노이에 한국어 학과가 엄청 생기고 있었거든.
그 사이 J언니는 사십 대 후반을 지나 오십을 넘겼지만 여전히 생기가 넘쳤다. 2년간의 베트남 생활을 이야기할 땐 타향살이가 너무 힘들다며 푸념을 하곤 했지만 눈빛만은 그 어느때보다 반짝거렸다. 막상 아이들과 떨어져 살다 보니 애틋한 마음도 커졌다고 했다. 그리고 이십 대 중반에 결혼해 25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살아 보니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만족한다고 했다.
한국에 있을 때 우리는 만날 때 마다 결혼제도의 불합리함과 떨치지 못하는 미련함에 대해 주로 한탄을 했다면 이제 그녀는 어떤 강을 건너가 이곳을 지긋이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많이 부러웠고 그만큼 기뻤다. 그리고 다시 1년 반이 흘렀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2020년 가을이었다. J언니에게서 메시지 한통을 받았다.
- 나, 한국에 돌아왔어. 아빠가 많이 아프셔.
베트남으로 떠난 지 4년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다. 학과장이란 자리와 막 배우기 시작한 베트남어에도 조금씩 익숙해질 시점이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베트남 대학생들과도 꽤 친해졌는지, 그녀는 그곳 아이들이 큰 기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번은 거리의 오토바이에 치여 쓰러진 J언니를 제자인 학생이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어갔다고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 J언니는 행복해 보였고, 나는 속으로 어쩌면 그녀가 베트남에서 쭉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모든 걸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나는 2주간의 자가 격리 기간을 끝낸 그녀와 카페에서 만나 잠시 커피 한잔을 했다. 우리는 마스크를 낀 채로 마주 앉았고 세상은 눈 돌아 갈 정도로 빠르게 변해버린 뒤였다.
- 대체 학교는 어쩌고?
- 일단은 휴직 계를 냈는데 6개월 후까지 돌아가지 못하면…….
아무래도 그만두어야겠지?
- 어떻게 만든 자리인데……. 나이도 있잖아.
-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빠 마지막도 함께 못하면서 내가 뭐한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나,
만약 베트남에 있을 때 아빠가 떠나시면 나 너무 후회될 것 같더라고.
- …….
- 막상 결심하니까 한국에 올 때 까지 불안해 죽겠는 거야.
비행기 표를 겨우 구했는데 2주나 남았고
그 사이에 아빠 떠날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J언니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눈가가 촉촉해졌다. 나는 뭔가 말을 보태려다가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그냥 듣기만 했다.
- 사람을 알아봤다 못 알아봤다 하셨다는데 나 보자마자 웃으시더라.
- 좋으셨나 보다. 큰 딸왔다고.
- 응. 나보고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너 얼굴이 좀 변한 것 같다? 이러시는 거 있지.
옛날 내 얼굴 기억하고 계시나봐. 결혼 전, 당신 딸로만 있을 때.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우리는 마주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웃는 것 외에 슬픔을 옅게 할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빠도 그랬었다. 19시간의 수술 후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돌아와서 아빠가 나와 언니에게 물었던 말은 ‘학교 가야지’였다. 아직 한 식구였을 때, 아빠는 일하러 가고 우리는 학교에 가던 아주 평범한 어떤 날이 아빠의 기억 속에는 오롯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J언니와 나는 최근에도 가끔 만나 커피를 마신다. 카페 이용 금지일 땐 얼굴을 보지 못하다가 카페 좌석 1시간 허용이 되자마자 잠시 만나기로 했다. J언니의 아버지는 상황이 좋지 않지만 잘 버티고 계신다고 했다. 나는 다행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기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요즘은 지인들과 만날 때 아픈 부모를 돌보는 일이 자주 화제에 오른다. 대부분 근심 섞인 대화가 오가게 마련이고 누구라도 곧 닥칠 일이기에 다들 옅은 한숨을 뱉어내곤 했다.
다들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J언니의 아버지가 잘 버티고 계신다는 말이 그래서 나는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아버지들이 견뎌주시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드는 한편 아무리 미화해도 환자를 돌보는 일은 진이 다 빠지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지인들이 모였을 때 이런 말을 한다.
- 진짜 우리나라 딸들은 상 받아야 해.
- 왜 아냐...병원 가봐.
아픈 부모님 모시고 오는 건 거의 다 딸들이다?
어떤 딸들은 아빠를 너무 좋아해서, 또 어떤 딸들은 평생 아빠를 미워한 것이 미안해서, 그리고 어떤 딸들은 의무감으로 환자가 된 아버지를 돌본다. 그런데 그것을 개인이 모두 떠안아야 하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지겨워질 때가 있고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돌봄의 사회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그 누구도 아름다운 이별을 장담할 수 없다.
칼처럼 단박에 다가오는 죽음을 맞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지난한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그걸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무척 버겁다. 단순히 좋다, 나쁘다, 그런 감정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널뛰기하는 복잡한 감정을 오가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럴 때면 자신이 몹시 싫어지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J언니의 푸석푸석해진 머리결과 피로에 지친 얼굴에 나는 경의를 표하고 싶어졌다. 한국을 과감히 떠날 때 두 아들을 두고 가는 건 조금도 걸려하지 않던 그녀가, 평소에도 무척 이성적이며 감정처리에 능숙한 그녀가 흐트러져 가는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빠는 모든 딸들의 첫사랑이기 때문일까? 나는 문득 아빠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전화를 받아줄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도리없이 서글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나의 표정을 봤다면 ‘저게 바로 아빠 잃은 딸의 얼굴이구나!’ 하고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