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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희 Jan 22. 2022

카프카의 변신

내가 암병동에서 알게 된 것들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카프카의《변신》을 꼽는다.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갑충으로 변하는 내용인데, 이십대 때 이 소설을 읽고 가족이란 무엇인지, 인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변신》은 소설 속 주인공 그레고르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흉측한 해충으로 변하면서 그의 가족들과 겪는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해충이 되자 그레고르는 가족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다. 가족들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거부당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들은 점점 그의 존재를 잊어간다. 그의 방 청소도 점점 뜸해지고 음식도 허술해진다. 그레고르는 끝내 소외된 채 가족들을 회상하면서 죽어간다. 가족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가족이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해도 우리가 그를 끝까지 사랑하고 아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빠가 수술 후 암 병동에 입원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간병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간병하면서 본 환자들은 병원 밖을 오가는 활기찬 사람들과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치명적인 병에 걸린 순간부터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분리되어 존재하고 생활해야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암 병동에선 병원 밖에서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상황이 일상으로 이어졌다. 어떤 병동에선 안색이 회색에 가까운 환자들을 수시로 목격했다. 병원 지하 매점에서는 오렌지색 얼굴을 한 환자가 주치의 몰래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는 모습도 종종 목격했다. 암 병동에서 몇 주쯤 지내다보니 환자의 얼굴색만 봐도 어느 병동에서 왔겠구나…… 하는 짐작이 가능해질 정도였다. 


점심 먹고 산책을 다녀왔다며 밝게 인사하던 환자가 몇 시간 후 갑자기 숨을 거두는 일도 목격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코드블루*를 외치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의 처연한 눈빛을 밤낮으로 목격해야만 했다. 아빠의 투병 기간 동안 나는 가족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깨고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다. 수술 후 아빠의 상태는 경과를 예측하기 어려웠고 안정적이다가도 새로운 증상들이 나타나 우리를 가슴 졸이게 했다. 하루는 기대로 들떴다가 다른 하루는 체념과 비관이 잠식하기를 반복했다. 


아빠의 경우, 보호자 세 명(엄마, 언니, 나)이 번갈아가며 돌봄을 이어갔지만 그것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아픈 부모님을 모시고 병원을 드나드는 건 대부분 딸의 몫이다. 각자의 몫을 하며 가정과 병원을 오가다가 교대시간이 되면 언니와 나는 병실에 마주 앉아 이런 이야기를 했다.      


  - 와! 대한민국 딸들, 진짜 고생이 많다.      


아빠가 탄 휠체어를 밀고 병원 로비를 오갈 때는 같은 상황에 놓인 수많은 딸들과 눈을 마주치곤 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안쓰럽게 바라보는 눈빛을 주고받기도 한다. 이미 1년 전 아픈 아버지의 돌봄 생활을 시작한 지인은 매달 들어가는 간병비와 병원비, 약값만 사백만 원에 이른다고 했다. 그녀는 결혼하지 않았고 다행히 벌이도 나쁘지 않아 그 비용을 1년째 감당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기약 없는 그 돌봄이 너무나 무섭다고. 몇 달 후 지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할까 말을 아끼고 있을 때 그녀가 먼저 이렇게 말했다.     

 

  - 경희야, 나 이제 살았어.      


처음엔 내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그제야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은 이제 살았다는 말,  누가 그녀를 나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에겐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외부의 도움 없이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끈끈한 가족의 사랑만으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돌봄을 전담하다 지쳐나가 떨어지는 일은 예삿일이며 기적 같은 회복이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힘으로 먹고 배설하지 못하는 비참함을 겪는데 돌봄이란 그 지난한 과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덩달아 일상이 무너지고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감정이 수시로 오르내린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카프카의 소설《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주인공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가족들은 처음에는 그를 안쓰럽게 생각했다. 어머니는 쓰러지고 아버지는 증오심에 불타는 눈빛으로 주먹을 쥐었다. 여동생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문을 닫았다.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위해 처음에는 세심하게 먹을 것을 챙기고 방을 청소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가족들은 변해간다. 급기야 여동생은 이렇게 말했다.  


   - 이 짐승은 오빠가 아니에요. 

     이쯤에서 없애 버려야 한다고요.     


그녀의 말은 그에게 곧 사망선고가 된다. 카프카의《변신》을 다시 읽으며 나는 가족에 대해, 돌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그레고르가 쓸모없게 되자 가족들은 그를 냉대하고 귀찮은 존재로 취급했다. 그가 죽어도 연민의 정도 전혀 없었고 오히려 홀가분해 하기까지 한다. 그레고르는 그날 밤 가족들을 회상하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죽음, 죽어감이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다. 그리고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돌봄이란 진이 빠지는 일이 분명하며 누구에게나 다가올 씁쓸한 미래다. 돌봄의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나도 당신도 그레고리처럼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너무 쓸쓸하고 아프지만, 이것이 삶의 리얼리티다.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http://naver.me/5YiuzOhl



김경희 / 공명(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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