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희 Feb 11. 2022

가족은 서로를 모른다

조금 더 알아갔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엄마는 아빠가 자식들에게 남겨준 게 없다는 말을 지금도 가끔 한다.


 아빠가 재산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나는 아빠가 재산을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 더없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는 재산만이 아닌 빚도 남기지 않았다. 원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거라는 걸 몸소 보여준 셈이다.


대신 아빠는 자식들에게 흔적을 남겼다. 거울을 볼 때마다 혹은 언니와 커피를 마시거나 오빠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내 눈에, 언니의 얼굴에, 오빠의 입매에 아빠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건 아빠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을 것들이다. 이처럼 아빠가 남겨준 것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아빠가 남겨준 또 하나의 유산은 삶의 태도다. 아빠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계는 가만히 기다린다고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 뛰어들어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물론 아빠는 내게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자식을 앉혀 놓고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며 훈계한 적도 없으니 말이다.

      

내가 보기에 아빠는 그저 당신의 인생을 살았다. 어떻게 해야 하루하루가 즐거울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고 실제로 삶이 그러했다. 그러니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도 며칠이면 툭툭 털어버리고 놀러 나갈 수 있었고, 친한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도 그를 탓하거나 분해하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한량이었지만 엄마의 표현대로라면 아빠는 무능한 가장이었다.




놀기 좋아하는 아빠는 택시 운전이 지긋지긋했다. 그러다 건설업이 호황일 때 역시나 남의 이야기만 듣고 중장비업에 손을 댔다. 귀 얇은 사람들의 최후가 늘 그렇듯 아빠는 IMF 시기를 맞아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받아둔 어음은 휴지 조각이 되면서 한량 같은 아빠의 얼굴에도 핏기가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과 가구 등에 이른바 ‘빨간 딱지’로 불리는 압류 스티커가 붙었다. 우리 집이 곧 남의 손에 모두 넘어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전라북도 익산에서 맨주먹 쥐고 올라와 서울에 근근이 마련한 집이었다. 엄마는 뒤돌아 앉아 울었고, 식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상황에 놓였다. 그때도 아빠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빠가 ‘미안하다’라는 4음절의 말을 우리에게 건넸다면 그를 미워하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때마침 취업에 성공한 나는 회사에서 전세대출을 받아 독립이란 것을 했다. 오빠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기울어진 아빠의 사업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이 완전히 경매로 넘어갈 때까지 오빠는 빈 집을 지켰고, 그즈음 아빠와 엄마는 고향 근처로 내려가 식당을 열었다. 잘 살아보겠다고 서울로 올라간 지 30년 만의 일이었으니, 결론적으론 몹시 초라한 귀향이었다.


그 당시 나의 회사 생활도 녹록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때려치울 마음이 들었지만 통장에 찍힌 숫자를 확인하면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구석진 시골의 한물 간 가든에서 닭백숙을 고아 팔았다. 막내딸이 대기업에 다닌다고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회사를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가족 중 누구도 그 당시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 시절은 우리 모두에게 긴 상처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시간이 흘렀다. 한 달에 두 번, 아빠와 엄마가 일하는 시골 식당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도시로 돌아오는 게 당시 내 일과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갈때 마다 마주한 아빠의 모습은 재산을 탕진한 사람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늘 활기에 찼고 자신감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즐거워보였다. 엄마는 하소연을 하듯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느이 아빠란 사람은 다 날려먹고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니, 응?      


엄마 말로는 식당 점심 장사가 끝나면 아빠는 좋은 옷을 갈아입고 시내로 놀러 나간다고 했다. 친구를 만나 다방도 가고 커피도 한 잔씩 마셨을 것이다. 아빠는 곧 죽어도 남에게 커피를 쉽게 얻어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고 했으니까. 엄마는 그런 상황에서도 삶의 즐거움을 놓지 않는 도무지 아빠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회사 생활이 힘에 부치던 나도 엄마의 의견에 동조했다. 가족들을 곤경에 처하게 해놓고 아빠는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있지? 엄마 말로는 잠도 잘 자고 식사량도 예전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입맛을 잃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때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러고도 인간이니?” 라는 한 마디였다.

나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 아빠는 진짜 이기적인 사람인 거 아닌가?

    평생을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야.


나는 수십 년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고 아빠 역시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빠의 숨이 멈췄을 때,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아빠는 그저 받아들인 거였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변명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연유로 나는 한때 아빠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아빠의 모습이 그냥 싫었다. 왔냐고 묻는 아빠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휙 들어가 버린 적도 여러 번이다. 아빠는 어차피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버릇없이 군다고 쫓아 들어와 추궁한 적도 없고 “이놈의 자식!” 하며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니 아빠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는데, 나는 아빠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놀기 좋아하는 것도 아빠고, 귀가 얇은 것도 아빠이며, 남을 탓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 것이 아빠라는 사람인데 말이다. 아빠는 이래야 한다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두 가지의 단점만 보던 나는 아빠의 수많은 장점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 명명백백한 나의 실수다.      


이제야 미처 몰랐던 아빠의 모습이 뭉게뭉게 떠오른다. 가족들이 외면할 때 아무렇지 않게 돌아서던 모습, 우연히 길에서 만났을 때 반가우면서도 다른 볼일이 있다며 서둘러 멀어지던 모습, 가족이 모여 식사할 때 자신은 나중에 먹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시던 모습들 말이다. 아빠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단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어느 날부턴 염색을 포기하고 백발이 되었으며 하루 종일 집에서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토록 술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던 사람이었는데  말년에는 마치 성인군자처럼 하얀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체 아빠의 진짜 모습은 어떤 거였을까? 묻고 싶은 말은 많지만 말길이 끊긴 아빠는 대답이 없다.

아버지들은 변명하지 않는다. 하얀 사람이 되어, 다만 사라질 뿐이다.         



<아빠가 80세에 그린 '자화상'>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하다


http://naver.me/5YiuzOhl



김경희 / 공명(2021. 11. 25)


이전 13화 당신은 아빠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