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제 어디든 훨훨 다니실거죠?
2019년 늦가을, 11시간 만에 도착한프랑크 프루트 공항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4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매년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다큐멘터리영화제에 참가할 팀을 뽑는 행사에 서류를 제출했는데 운 좋게 기회를 얻은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해서는 그냥 어디라도 가고 싶었다. 아이 문제도 그렇고 속 편하게 여행을 다닐 상황은 아니었다. 떠나려면 핑계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핑계를 찾아내는데 꽤나 선수다.
어찌어찌하여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고백하건데 유럽이 처음인 나는 가슴 두근거리는 여행의 출발을 위해 국적기를 선택했다. 해당 국가의 국적기를 타는 순간 내가 한국을 떠나고 있음이 더욱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11시간을 날아간 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두어 시간을 보낸 후 다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네덜란드에 도착했다. 늦은 밤에 도착해 공항 가까운 곳에서 하루를 묵었고 다음 날부턴 일행들과 트램을 타고 이동해 영화제가 열리는 현장을 돌아봤다.
여행 둘째 날에는 100년이 넘은 극장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작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11월 끝자락의 암스테르담은 꽤 추웠는데, 비까지 추적추적 내려 감상에 젖기에 딱 좋았다. 일행과 나는 수시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냥 한국을 떠나온 것만으로도 뭔가 마음이 풀어지는 듯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한 일정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일행들과 함께 미술관 관람에 나섰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국립박물관이었는데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렘브란트의 대표작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예술의 황금시대를 연 서양 미술 사상 17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손꼽히는 만큼 직접 마주한 그림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점심으로 둥그런 빵과 그 사이에 끼워진 갈색 고기, 그리고 감자튀김과 커피를 먹었다.
식사 후 우리는 그토록 기대해마지 않던 반 고흐 미술관에 도착했다. 고흐의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에, 꽃피는 아몬든 나무 작품을 감상했고 친구들에게 줄 엽서와 기념품도 몇 개 샀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꽤 즐거운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감상한데다 낮에 먹은 맥주와 감자튀김의 맛있는 여운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와 짐을 풀고 침대에 누웠을 때, 나는 즐거운 기분이 아니라 슬픈 기분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분명 만족스럽고 감동적이며 내 생애 다시 또 있을지 모를 행복한 하루였는데 뭔가 묵직하고 먹먹한 느낌이 나를 슬프게 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아무튼 쓸쓸하고 묘한 슬픔 속에서 나는 일찌감치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리고 새벽 3시가 지날무렵 문득 잠에서 깼는데 그제야 나는 그 슬픈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빠 생각이 났던 거다.
그림을 좋아하는 아빠는 유럽에 가보고 싶어 하셨다. 발병 전까지도 산수화를 꽤 오랫동안 그리셨고, 뒤늦게 인물화에 빠지면서 부턴 우리 삼남매의 초상화를 그려주시겠노라 약속하셨다. 젊은 나보다도 길눈이 밝은 아빠는 혼자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서 독학으로 배우는 그림책을 사셨고 종종 인사동에 나가 물감과 화구를 구입하셨다. 그리고 식사 때와 운동 시간을 빼면 그림을 그리셨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아빠는 TV다큐멘터리를 시청했는데 대부분 해외 기행프로그램이었다. 아빠는 속으로 꿈을 꾸고 계셨던 걸까? 한번은 TV기행다큐를 시청하는 아빠에게 이렇게 물었다.
- 아빠, 해외여행 어딜 가보고 싶으세요?
- 여행? 글쎄다......
- 가고 싶으시면 가세요. 가까운 일본이나 베트남도 좋고.
- 거긴 싫어.
- 그럼 어디요?
- 유럽.
- 유럽이요?
- 스위스 말이다. 융프라우 같은 곳.
그때는 연세도 있으신데 뭘 그리 먼 곳까지 가보고 싶어 하실까? 솔직히 그런 생각을 했다. 결국 스위스는커녕 유럽 어디도 보내드리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암 수술을 받은 이후 아빠는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는 강인하면서도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지 불과 1년 사이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TV를 보며 우리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때 아빠의 지난한 투병생활을 함께 한 것 역시 해외기행 프로그램이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산다고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 한번 가보지 않았던 걸까? 해외여행이 무슨 대수라서가 아니다. 사람이 살면서 한번쯤 평생 가보고 싶었던 곳은 가보고 생을 마감해야 하는 거 아닐까?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에 가보고 싶었던 아빠는 아마도 닿을 수 없는 곳이 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빠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기 전 날에야 그곳이 마지막 병상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여간해서 불안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빠지만 그날은 유독 많이 눈물을 보이셨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빠 앞에서 간식도 먹고 커피도 마셨지만 손이 떨리는 것을 감출 순 없었다. 호스피스 병동은 죽음의 그림자가 떠도는 듯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죽음의 강을 건널 것처럼 보이는데도 한 환자는 식사에 몹시 집착했다. 반면 아빠는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 이미 끊은 지 오래였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아빠는 포기도 아니고 무엇도 아닌 슬픔으로 점점 기력을 잃어갔다. 대신 눈빛만큼은 그렇게 깨끗할 수가 없었다. 깊은 산 속 새 같은 순박한 눈빛이었다. 아빠는 그 깊은 눈빛을 품고 병상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암스테르담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내내 아빠의 눈빛이 생각이 났다. 함께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미술관에도 가면 얼마나 즐거울까? 아빠는 저만치 미술관이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커피도 한 잔 마시자고 하겠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떠난 아빠에게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아빠, 암스테르담이든 융프라우든
가고 싶은 곳 어디든 훨훨 가실 수 있는 거죠?“
나는 몹시 고대하고 주위를 빙 둘러보았지만 대답이 들릴 리가 없지 않은가? 어느새 멀리 동이 터왔고 창밖으로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지금도 암스테르담의 며칠을 떠올리면 몹시 춥고 쓸쓸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