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서울올림픽, 그리고 칼루이스의 사인
모처럼 일이 없는 주말, 빗소리를 들으며 누워있는데 후배 작가에게서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5, 6년 전 EBS의 모 프로그램에서 함께 일했던 막내 작가였다. 까만 눈을 또르르 굴리며 작가가 되겠다고 말하던 그 친구는 이제 모 프로그램의 메인작가가 된 지 오래였다. 내게는 항상 귀여운 막내 동생 같은 후배인 그녀가 연락을 해온 이유는 깜짝 결혼소식이었다.
온라인 청첩장에 담긴 커플의 모습은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예뻤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시국이 이러하기에 그 예쁜 커플의 결혼식에 내가 참석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꼭 참석하겠다는 말은 삼갔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팬더믹 시대에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진심인지 아닌지도 모를 축하를 건네는 것이 썩 좋다고 여기는 편도 아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참석하도록 해볼게, 정도의 말만 남기고 선물을 폭풍 검색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 평소 물건을 많이 사는 편은 아니지만, 아주 가끔 푹풍검색 후 물건이 마음에 들 경우 똑같은 걸 여러 개 사들일 때가 있다. 대부분은 그 물건에 확 꽂혔을 때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날 주문한 쇼핑 목록 중에 후배에게 보낼 선물은 단 2가지였고 기타 잡다한 것들 대부분은 레트로 문양의 유리컵들이었다. 굳이 변명하자면 유리컵은 요즘 들어 입버릇처럼 말하는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 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훔친 유리컵은 88올림픽 로고가 새겨진 빈티지 스타일의 주스 컵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옛날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왜 그런지 88올림픽 로고만 봐도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면서 특별한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1988년,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 88서울올림픽이요. 저는 칼루이스와 악수를 했거든요!”
아빠는 서울올림픽이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 몹시 들뜬 사람처럼 보였다. 택시 영업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TV 부터 켰고 올림픽 개최 준비 소식을 꼼꼼히 챙겼다. 그깟 올림픽이 무슨 대수냐고 하겠지만 그건 우리들이 아버지 세대의 삶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시골 출신인 그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눈 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로 올라와 꾸역꾸역 일상을 이어가던 소시민들이었다. 다만 서울이란 곳은 화려한 반면 현실이 녹록치 않았다. 고향과 달리 별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서울하늘처럼 그들의 앞날도 불투명했지만 그저 서울에 산다는 자부심 하나로 빡빡한 삶을 이어가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고향으로 쉽게 돌아갈 수도 없고 이곳에도 완전히 마음을 붙이지 못한 사람들. 산업화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럼에도 자신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이곳이 올림픽 개최지가 된다는 것이 그들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게다가 아빠가 누구인가?
신문물이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는 성향을 가진 나의 아빠가 아니던가?
88 서울올림픽은 그야말로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행사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차례로 확정되면서 정부는 산업화, 도시화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결정되던 순간, IOC위원장이 외쳤던 “쎄울, 꼬레아!”라는 말은 당시 서울시민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버렸고, 택시드라이버였던 아빠의 가슴에도 자부심처럼 꽂혀버렸다. 서울시민. 그렇다. 어느 날, 택시 영업을 일찌감치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가족들을 불러 앉히곤 이렇게 말했다.
“곧 올림픽이 시작되지 않니?
서울시민이라면 관심을 가져야지. 우리 가족도 관람을 가자꾸나!”
5명의 가족이 함께 움직인다는 건 복잡한 일다. 엄마는 비용 걱정으로, 우리들은 또 나름대로의 이유로 마뜩찮은 표정을 지으며 동시에 이렇게 외쳤다.
“올림픽을 보러 간다고요??”
며칠 후 아빠가 우리들 앞에 내민 것은 올림픽 경기 관람권 5장이었다. 인기 종목의 티켓은 구할 수도 없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는지 아빠가 구해온 것은 ‘수구’라는 비인기 종목의 티켓이었다. 대체 수구가 어떤 운동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우리 가족들에게 아빠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아무려면 어떠니? 그래도 올림픽인데!
우리는 포기 반 설렘 반인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수구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빠는 가뜩이나 자주 쉬는 택시 영업을 경기관람 핑계로 또 하루 쉬었고 엄마는 그것이 내심 못마땅했을 것이며 부모의 싸늘한 관계를 감지한 우리 남매들은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수구라는 경기는 무척이나 지루했다. 이게 뭐야? 싶은 마음이 들면서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기대와는 다른 시간을 보내고 경기장을 나서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저기야, 저기! 칼루이스가 왔대!”
당대 최고의 육상스타였던 ‘칼루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아직 초등학생이던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세기의 대결인 칼루이스와 벤존슨의 빅 매치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것도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엄청나게 키가 크고 거대한 체구의 칼루이스를 향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갈 때 나는 본능적으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인파 속 끄트머리에서 서서 칼루이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육상 경기 날이 아니라 주변에는 기자들이 없었다. 지금 기준으로는 보안 등의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을 테지만 당시는 약간 두루뭉술한 것이 통하던 1980년대가 아니던가? 그렇게 우왕좌왕 사람들이 모여들자 칼루이스가 뭔가 결심한 듯 무리의 맨 뒤에 있던 나를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그는 돌연 펜을 꺼내더니 가지고 있던 엽서에 쓱 사인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모두에게 해줄 순 없으니 무리 중 가장 어린 아이에게 사인을 해주겠다는 뜻인 듯 했다. 나는 얼떨결에 앞으로 떠밀려나가 무리의 사람들을 대표해서 칼루이스가 건넨 사인을 받았다.
30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허리를 굽혀 사인을 하던 거대한 체구와 사인 엽서를 건네던 검은 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손등은 무척이나 까만 반면 생각보다 하얀 손바닥이 나로서는 무척이나 생소했다. 왜냐하면 열두 살 인생에서 처음 본 외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사인본 엽서를 받았다. 그런 이유로 사십 여년 인생을 통틀어 그날은 내게 잊을 수 없는 하루로 남았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고 느낄 때가 가끔 있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에 조금씩 고개가 끄덕여질 때가 그러하다. 아빠는 넉넉한 형편이 아님에도 88서울올림픽 경기 티켓을 구했고 63빌딩이 개장했을 때 아이맥스 영화관으로 우리를 데려갔으며, 일을 쉬는 날(너무 자주 쉬어 탈이지만)이면 택시를 몰고 드라이브를 가거나 한탄강으로 물놀이를 떠나곤 했다.
그래서인지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로지 잘 놀고 잘 먹은 기억뿐이다. 아빠는 부단히 새로운 일을 기획했고 노는 걸 주도했는데(딱 지금의 내 모습이다^^::) 집을 떠나 어딘가로 모험을 떠날 때 느끼는 해방감이 어떤 건지 내게 가르쳐주었다.
엄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어쩌면 좋은 부모란 재산을 물려주는 사람이 아닌 추억을 물려주는 사람이 아닐까? 세월이 제법 흘렀을 때 당시의 추억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면, 그들은 좋은 부모임에 틀림없다.
그나저나 가끔 몹시 궁금하다. 칼루이스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