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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Sep 18. 2024

까미노는 소리를 들어야 해

Day 15. 까스뜨로헤리스 →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

까스뜨로헤리스의 전경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6월


모스뗄라스 언덕을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지난밤 쉼을 마련해 준 까스뜨로헤리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까미노를 처음 찾았던 겨울에도 같은 방식으로 까스뜨로헤리스를 눈에 담은 적이 있다. 산 아래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이 마을을 바라보며, 늦은 밤에 도착한 내게 보까디요(Bocadillo, '샌드위치'의 스페인어)를 만들어주셨던 세뇨라는 어떤 아침을 맞이했을지 궁금했다. 하루종일 공중에 습도가 가득한 날이었다. 안개를 가르며 머리에 앉은 물기를 털어내며 이곳까지 걸어올 순례자를 위해 세뇨라는 열심히 빵을 굽고 있을 터였다. 대면하지 못한 포근함에 위안을 받으며 나는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모스뗄라스 언덕에 올라 겉옷을 벗어 정리를 했다

그때와 달리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아무것도 섞인 것 없이 매우 맑았다. 구름은 해를 충분히 가릴 정도로 두텁게 낀 날이었다. 덕분에 해가 땅을 데우기도 전에 바람이 찾아와 열기를 훔치고 달아났다. 엄마가 걷기에 딱 좋은 아침이었다.


그러나, 한겨울에도 조금만 빠르게 걸으면 금세 온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나는 달랐다. 언덕을 오르다 보니 머리카락 사이에서 땀이 나기 시작해 얼굴을 따라 떨어지고 있었다. 언덕의 정상에 도착해 바로 대피소를 향해 걸었다. 얇은 여름 외투를 벗고 배낭을 정리했다. 바람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드러난 피부 표면을 따라 흐르던 땀을 앗아가길 기다렸다. 나는 송골송골 맺혔던 더위도 바람에게 덤으로 내주었다.


흐린 날에 사진이 잘 나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불변의 성공 법칙을 떠올린 듯 엄마는 이 날따라 유난히 스마트폰을 쥔 손을 길게 뻗어 들고 화면을 보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엄마는 입이 가늘어지게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눈가에도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가 셀피를 찍는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가끔 새 옷이나 액세서리를 하고 찍은 사진을 내게 보내준 적은 있지만 그 생생한 현장을 목격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몇 차례 사진을 찍고 나면 나는 그 앵글로 뛰어 들어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졸라댔다.




걷기 시작한 지 세 시간가량 흘렀을까? 그때 통과하던 마을 끝에서 배낭을 멘 두 순례자를 발견했다. 어쩐지 뒷모습이 내가 아는 이들을 닮은 듯 보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켜고 줌을 당겨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오십 대 오십으로 긴가민가했던 나는 그들이 브라이언과 에밀일 거라는 확신으로 기울었다. 우리가 그들을 따라잡았다는 생각에 들뜬 엄마도 얼른 쫓아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새가 뱁새를 쫓는 격이었다. 다리가 유난히 긴 저 둘을 우리는 쉽사리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들을 향해 나는 몇 차례 불러보았지만 전혀 미동도 없었다. 그렇게 수 분이 흘렀을 때 마침 브라이언이 굽어 있는 길을 따라 돌다가 스틱을 높게 들고 흔드는 날 알아보았다. 그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바지 주머니에 그걸 집어넣었다. 그리고 여유가 생긴 손으로 천천히 걸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옆에 있던 에밀은 양손에 스틱을 든 채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의 거리는 이내 좁혀졌고 까스뜨로헤리스에서 헤어지며 인사했던 같은 방식으로 허그를 하며 서로를 반겼다.


내게 브라이언은 방금까지 그가 듣고 있었던 음악을 들려주었다. 아침의 까미노를 눈에 담으며 듣기 좋은 잔잔한 음악이었다. 잭은 내가 음악을 들으려고 하면 이어폰을 빼고 까미노의 소리를 들으라며 종종 잔소리를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을 따라 까미노를 향해 귀를 열어두고 있으면 정말 음악이 필요하지 않았다. 바람이 가늘게 일며 귀를 간지럽게 하는 소리, 마르지 않은 낙엽 위로 작은 생명이 걸어가는 소리, 나뭇가지에 가볍게 톡 하고 앉은 새가 노래하는 소리, 순례자가 서로를 알아가며 대화를 나누는 재잘거리는 소리까지, 크고 작은 소리의 세계가 펼쳐졌다.


브라이언이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잭의 가르침에 반하여 길 위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그가 알면 나를 또 혼내려나? 그래도 까미노의 정서를 헤치지 않는 음악이니 용서해주지 않을까? 이 자리에 함께 있지 않은 이에게 꾸지람을 듣진 않을지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도 나는 브라이언이 들려주는 음악이 마음에 들어 그 음악을 담기도록 영상을 찍었다.


브라이언과 다시 함께 걸은 길


"7은 어때?"


언젠가 브라이언은 내게 자신이 타투로 무엇을 새기면 좋을지 추천을 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타투가 처음이라는 말에 신중히 생각하던 차에 나는 지난밤 우리의 대화를 떠올렸다.


"네가 J라고? 말도 안 돼."

"그러는 너는! 네가 T라고? 누가 봐도 넌 F야."


우리는 서로 성격유형검사 결과를 공유하다 말고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이 계획한 대로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나는 그가 J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내게 일할 때만큼은 J가 확실하다고 결과의 정황을 밝혔다. 그가 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나는 입을 길게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믿어주겠다며 응답을 했다. 실은 그 말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그저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J라고 말하는 브라이언에게 넌 P야, 하며 놀려댔지만 내가 본 그는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유로 까미노를 걸으며 만난 친구들을 위한 선택을 하며 자신의 계획을 선뜻 수정해 나가는 이가 브라이언이었다. 


이에 맞서 툭하면 눈물로 얼굴을 적시는 내게 브라이언은 내가 명백한 F라고 주장했다. 난 그저 느끼는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은 데다 그중에서도 특히 슬픔에 관해선 깊다 못해 우물을 파는 터라 그런 것이라며 반박했다. 내가 아는 T와 F의 차이는 문제 해결 상황에서 구분할 수 있는데 이때 사고적으로 접근하면 T, 관계적으로 접근하면 F인 것이다. 까미노에서 엄마와 문제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브라이언은 과정이 아니라 늘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 내가 눈물바람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것만 봤던 터라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본래 사람은 입체적인 존재다 보니 16가지로 분류하는 틀은 그 사람의 전체 맥락을 볼 수 없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MBTI를 기반으로 하는 이 유치한 씨름에 내리는 결론은 항상 이런 식으로 끝이 난다.


"에니어그램은?"


에니어그램 유형이 무엇인지 브라이언은 내게 물었다. 에니어그램으로 나를 설명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누군가 물었을 때서야 사진첩에 스크린숏으로 저장해 둔 이미지를 찾아 결과를 공유한다. MBTI도 이런 식으로 답을 하다가 그것이 여러 번 반복돼 외우게 되었지만, 에니어그램은 아직이었다. 나는 수많은 스크린숏 중에서 에니어그램 진단 결과를 찾아 그에게 보여줬다.


"오, 7번 유형이구나! 나도야."


그는 주먹 쥔 손을 내 앞으로 가져왔다. 나도 같은 모양으로 주먹을 만들어 콩, 하며 살짝 부딪혔다. 그날 밤, 피스떼라까지 가는 길을 설명해 주며 주고받은 메시지 끝에 우리는 서로를 이렇게 부르며 밤인사를 했다.


- 잘 자, 넘버 7


"어디에다가 할까?"

"어디에 할지는 네가 정하는 거지. 7이 마음에 들어?"

"응! 좋은데?"

"나는 언젠가 9를 새기려고."

"9는 왜? 9가 되고 싶어?"

"에니어그램의 9번 유형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의미의 숫자 9를 새기고 싶어."


9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숫자라고 말한다.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 10은 신의 영역이기에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닿을 수 없는 셈이다. 10이 되기에 1이 모자란 숫자 9는 삶을 겸허히 바라보도록 한다. 10을 이룬 날에도 내가 아닌 타인이나 타 존재에 의해 채워졌거나 운이 작용했음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이는 무엇이든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1을 남겨둠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확장되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매번 10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둔다면 9나 8의 행복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 작은 숫자인 0이나 1도 소중한 날들의 일부임이 분명하니까.


구름이 점차 걷히기 시작했다. 그런 이유로 엄마가 걷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해가 나기 시작했지만 그 덕분에 길 위의 미물을 살펴보기 좋았다. 이렇다 할 풍경이 없는 메세따를 걷는 길이었지만 그 안에서 잔재미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살랑이는 잎을 바라보다 잎에 난 잔털을 슬며시 만져보았다. 손에 보들거리게 빛나는 바람이 묻어났다. 까스띠아 운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고양이를 발견했다. 들짐승처럼 어슬렁거리며 걷는 모양새가 제법 늠름했다. 나도 몸을 낮춰 같은 보폭으로 흉내를 내서 걸어보았다. 멀리서부터 진하게 향을 내뿜는 스빠르띠움(Spartium, 노란색의 들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스파티움이라고 칭하는 꽃의 스페인어)에 다가가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다른 색도 아닌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자랑스러웠다.


예기치 않은 바람의 방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묵직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높게 솟은 나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도 바람에 몸을 맡겨보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다른 존재에 나를 맡기려면 감각 하나 정도는 꺼뜨려야 하는 법이니까.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의 소리가 점차 커졌다. 길 위에 그 소리와 나만 있는 것 같았다. 아, 역시 까미노에서는 소리를 들어야 해. 그 순간이 간지럽게 좋았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경유지인 프로미스따의 한 식당에서 던을 만났다. 엄마와 나 보다 훨씬 일찍 길을 나선 던은 이 마을에서 머물 거라고 했다. 엄마와 나는 다음 마을인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를, 브라이언과 에밀은 수 킬로미터를 더 걸어서 멀리 갈 예정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식사일지도 모르는 점심 식사를 다 같이 하게 되었다.


"은영, 까미노에서 비건 메뉴를 찾는 건 힘들지 않니?"


방금 오븐에서 갓 구워 나온 비건 피자의 소스가 손에 묻지 않도록 두 조각을 겹쳐서 한 입 베어 문 내게 던이 넌지시 물었다. 나는 양껏 베어 문 피자를 오물오물 먹으며 그에게 할 말을 골랐다.


"한국 보다 쉬워요."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 해진 얼굴 셋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온 던, 아일랜드에서 온 브라이언, 프랑스에서 온 에밀은 스페인을 비건 음식을 찾기 무척 어려운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유럽이나 서양 문화권에서는 이 나라가 그렇게 느껴질지 몰라도 내게 스페인은 한국에 비해 비건 음식을 찾아다니기 무척 쉬운 곳이 분명했다.


단적인 예로 메뉴에 비건식이 없더라도 "쏘이 베가나"(Soy Vegana, '저는 비건입니다'라는 뜻의 스페인어)라는 문장 하나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을 제시해 주는 호의를 까미노에서 여러 번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비건과 베지테리언을 혼동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비건이 뭐예요? 하는 질문을 시작으로 비건을 왜 하는 거예요? 언제부터 했어요? 고기 정말 안 먹고 싶어요? 하며 줄줄이 이어지는 물음표에 가타부타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저 제가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하며 이유를 숨길 필요 또한 없었다. 이곳에서는 편안하게 나를 드러내는 것이 가능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까미노를 다니며 구매한 김치가 모두 비건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선 비건 김치를 파는 기업이 손에 꼽는데 어째서 우리나라 김치가 이곳에서는 죄다 비건으로 유통이 되는 걸까? 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최근 K푸드가 인기를 끌며 서구권에 진출하며 기업이 내세운 한국음식의 포지션을 어떻게 잡았을지. 아마 한국음식이 건강식이라는 인식을 이용하는 편이 쉬웠을 것 같다. 자연식과 결을 함께 할 수 있는 비건이라는 딱지를 붙여 식품을 판매하는 것이 기업의 이윤에도 도움이 되었으리라. 또한, 꽤 많은 브랜드의 라면이 역시 비건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내가 수년이 넘도록 먹지 못한 신라면도! 우리나라의 식품 업계가 비건 제품을 생산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만' 안 한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분했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우리나라의 사정인 것을.


"말도 안 돼! 스페인 음식은 죄다 고기에, 치즈가 잔뜩 들어가는데!"

"진짜예요. 까미노는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이 한국보다 훨씬 많은걸요? 제가 사는 동네에는 비건 식당이 딱 하나 있어요."

"정말이니?"

"네, 그 식당이 어디냐면…, 제가 사는 집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니?"

"밖에 나가면 먹을 게 없거든요. 비건이 되고 나서 요리사가 된 기분이에요!"


여행지가 아닌 거주하는 나라에서 비건인으로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하는 나를 하나같이 모두 딱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는 스페인보다 비건으로 식사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나에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이거 참,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유럽으로 이주를 고려해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던과 브라이언 그리고 에밀과 헤어지고 엄마와 나는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에 자리한 호텔을 찾았다. 우리가 이곳에서 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까스뜨로헤리스에서 이번 순례가 자그마치 네 번째라고 말하는 어느 한국인 순례자를 만났다. 그는 다음 행선지로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를 가기로 했다며 프로미스따를 지나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자신이 여태 까미노를 다니며 베드 버그로 고생한 이를 목격한 곳이 죄다 프로미스따였다는 것이다. 이미 30km 가까이 걸어 본 경험이 있는 엄마는 벌레에 물려 고생을 하느니 더 멀리 가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베드 버그가 매일같이 한 마을에 출몰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걱정이 많은 엄마와 굳이 걱정거리를 안고 그 마을에 머무는 것이 마음에 쓰였다. 그런 이유로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에 오게 되었다.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의 알베르게는 현재 영업을 하지 않는 터라 우리는 그 마을에 있는 1성급의 작은 호텔을 예약해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펴보니 그곳이 내가 12년 전에 묵었던 호텔과 같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프로미스따의 알베르게가 모두 문을 닫은 탓에 하는 수 없이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까지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알베르게 입구에 쎄라도(Cerrado, 영어의 'Closed'에 해당하는 '닫힌'이라는 의미의 스페인어)라는 사인물이 걸려있었다. 겨울의 까미노는 눈에 띄게 줄어드는 순례자의 수에 비례하며 알베르게 역시 문을 닫고 봄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추위를 피할 곳을 찾은 우리가 호텔에 들어서마자 주인은 와인을 한 잔씩 내어줬다. 꽁꽁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호텔의 주인으로 보이는 분께 다가가 미리 번역 앱에 작성해 둔 문장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그날 찍은 호텔의 사진도 함께 한 장씩 넘기며 추억을 꺼내놓았다. 그는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사진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했다. 난데없이 들리는 큰 소리에 리셉션에 앉아 있던 직원이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다. 주인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상에! 저 치카(Chica, 여자아이의 스페인어)가 다시 왔어. 그것도 12년 만에!"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커다랗게 뜬 직원은 느린 속도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사이에 주인은 리셉션 뒤 편으로 문이 나 있는 창고로 들어가 오렌지 색 티셔츠를 꺼내와 입고 있는 옷 위에 그대로 겹쳐 입었다.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는 나를 기다리게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거다. 그 티셔츠의 왼편에 호텔의 이름이 수놓아져 있었다.


호텔의 이름은 Amanecer en Campos. 깜뽀스의 여명이라는 뜻이다. 나는 깜뽀스의 여명과 머리를 맞대고 오래도록 간직할 사진을 찍었다.


뽀블라시온 데 깜뽀스에 자리한 호텔 주인의 모습 (좌) 2013년 1월, (우) 2024년 6월



Day 15. JUN 24, 2024

Castrojeriz → Poblacion de Campos, 28.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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