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니 Oct 01. 2024

부부, 그 징글징글하고도 뜻없이 애틋한

여보... 똥이 안 나와...

ㅡㄸ<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올해 일월부터 거의 한 달에 한 번 꼴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 2024년도 국가 건강검진'에 대한 알림톡을 보내왔다.

나는 홀수년생이므로 본인 부담 없는 대장암 검진 대상자이니  빠른 시일 내에 가까운 검진기관에 예약하신 후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것이다. 남편도 홀수년생이니 나처럼 알림톡을 주기적으로 받아왔을 것이다.

2월 톡에서는 9월 이후에는 검진이 몰려 예약이 불가할 수 있으니 지금 바로 예약하고 검진을 받으라고 하더니 3월 톡에서는 암검진 대상자에 대한 경품(베이커리 교환권)을 내걸면서 검진을 독려했다. 4월에는 분별잠혈검사 후 결과통보서를 지참해서 소속 지사를 방문하면 선착순 50명에게 선물을 준다고도 했다. 그래도 계속 검진을 안 하고 있자 9월에는 검진이 불필요하다면 보내준 알림톡 아래에 있는 대장암검진 제외신청 버튼을 눌러 검진 제외를 신청하거나 해당 지사로 전화해 주시면 검진대상에서 제외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은근히 협박(?)을 해왔다. 이토록 국가가 나의 대장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한편 번거롭고 한편 고마웠지만 일단 그 어떤 증상도 없기에 번번이 생활에 밀리고 게으름에 밀리다가 9월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검진을 가게 되었다. 그것도 남편이 올해 운전면허적성검사와 갱신을 해야 하는데 시력검사결과가 나온 건강검진표를 지참해야 한다고 해서였다. 운전은 곧 생활이므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원객들이 많이 붐비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아침 일찍 가기로 했다.

우리의 검진 목적은 대장암 1차 검사인 분변잠혈검사였다. 나는 아침마다 거의 규칙적으로 대변을 보는 편이고 남편은 그날그날 섭취양과 섭취음식과 위장과 대장의 상태에 따라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편이다. 가끔 혼자 난처한 일을 겪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대변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거나 하면 나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을 위협하지는 않는 정도다.

그날은 병원에 가서 분변잠혈검사를 하기 위한 채변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아침 대변을 참기로 했다. 병원은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니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9시쯤 병원에 도착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전화와 노트북으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 전화를 하고 상대방의 답을 기다리고 답을 받고 처리를 하려면 한 시간이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나는 참지 못하고 볼일을 봤다. 병원에서 안되면 채변할 용기만 받아와서 내일 채변오전에 병원에 가서 제출하면 되는 일이었다.


오전 10시가 좀 넘은 월요일이었다. 우리가 간 병원의 검진센터는 본관 건물과 떨어진 별관 건물이어서인지 조금도 붐비지 않아 바로 접수할 수 있었다. 채변용기가 든 봉투를 받아 든 남편은 바로 화장실에 가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나는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침에 다 눠서... 좀 남기고 눌걸 그랬네... 안 나올 것 같아... 집에 가져갔다가 내일아침에 하고 한번 더 오지 뭐... 했다.

화장실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혹시나 싶어 나도 화장실에 갔다. 세 칸인 화장실이 다 찼다. 아무래도 실패할 것 같은데 그냥 갈까 하다가 한 칸에서 사람이 나오길래 들어갔다.  조금만 나와주면 되는데 조금만... 하면서 힘을 줘 봤지만...

그때 남편 전화가 왔다.

어... 화장실 왔어..  똥이... 안 나와...

힘을 계속 주면서 띄엄띄엄 말했더니 남편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냥 나와... 뭘 그렇게 애를 쓰고 눌려고 그래... 집에 가져가서 하고  내일 한번 더  오면 될 거를...

아무래도 그래야 할 듯...

키들키들 웃으면서 통화를 끝내고 마무리를 랬더니 옆칸에서는 나와 비슷한 위를 하고 있을 사람의 기척이 들리고 밖에서는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아무도 안 나왔네... 어쩌고...

걔 중에는 나의 통화를 들은 누군가도 있을 것 같아 좀 부끄럽고 급하게 볼일을 보고 싶은데 안에서 똥이 안 나오네 어쩌네 한가롭게 키득거리고 있었으니 좀 미안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도 똥 얘기를 했다. 초록색 채변봉투겉면에 채변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놓은 프린트물이 붙어 있는데 맨 윗줄에 제출시간ㅡ검진전날변 (냉장보관필수)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걸 읽으며 크크 똥을 냉장고에 넣어 보관하래 냉장고에... 크크크 하면서 둘이 키득거렸다. 똥 얘기로 키득거리는 우리가 우스워서 좀 길게 키득거렸다. 어딘가 약간 모자라는 푼수부부 같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하긴... 제정신만으로 반백년 넘는 세월을 한 남자와, 한 여자와 어찌 살아내겠나... 부부란 참... 징글징글하고... 그렇구나...라고 웃음 끝에 생각했다.


몇 년 전의 건강검진 때의 일이다. 그때도 남편과 함께였고 그때는 위내시경 때문에 옥신각신했다. 겁이 많은  나는 수면내시경을 신청하고 남편은 일반내시경을 신청했다.  각자 다른 검진을  끝내고 수면 위내시경검사실 앞에 갔더니 남편이 먼저 와 있었다. 일반내시경 벌써 끝내고 온 거냐고 물었더니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왜 안 하려고 하냐고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물었더니 재작년에 했고 그때 괜찮았고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고 그 어떤 증상도 없으니 안 해도 된다는 거였다. 작년에 안 했으니 올해는 해야지 무슨 소리냐 그걸  떠나서 이왕 하루 시간 내서 병원 와 이것저것 검사하는 김에 하면 되지 왜 안 하려고 하냐 나한텐 한다고 하지 않았냐 일반이 싫으면 수면으로 하지... 혹시 일반내시경 무서워서 그러냐 그러면 나처럼 수면내시경으로 해라... 수면 내시경 7만 원이 아까워서 그러냐 재난지원금으로 결재되더라 검진 안 받으면 나중에 암 걸렸을 때 건강보험 혜택 못 받는다더라 받아라 받아라 제발 당신 안 받으면 나도 안 받을 거다... 일반내시경은 예약 안 해도 되고 지금 사람들도 없는 것 같으니 가서 받아라 받아라 쫌 이 인간아...

나의 짜증과 분노와 협박에도 남편은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의 자꾸 올라가는 목소리에 오히려 조용히 하라고 눈을 흘겼다. 그런 와중에 간호원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 안 깨어날 거야 가버려 꼴도 보기 싫어!!!

그렇게 일갈을 해놓고는 검사실로 들어갔다. 주삿바늘을 꼽은 채 이동용침대에 눕혀 옮겨졌다. 남편을 향했던 화가 공포로 변했다. 누구나 잠시 해보는... 만약에 이대로 깨어나지 않는다면... 하는 불길한 상상이 온몸을 급습했다. 침대가 멈추고 앞뒤로 커튼이 쳐졌다.

커튼 밖은 소란스러웠다. 다다다닥 급한 발걸음 소리... 각종 기구들이 덜그럭거리는 소리... 웨에에엑... 억지로 게워내는 듯한 소리...

드디어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 발소리는 내 바로 옆에서 멈췄다. 나를 에워싼 커튼은 열리지 않았고 대신에 보호자 오셨어요? 하는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들리지 않았고 이어서 그럼 소지품 침대 밑에 넣으세요... 하는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아마도 보호자 오셨어요? 하는 물음을 받은 당사자가 고개를 가로저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내 침대의 커튼이 젖혀졌다. 같은 목소리의 간호원이 나에게도 물었다.

보호자 오셨나요?

나는 대답했다.

네... 밖에 남편이 있어요...

간호원이 내 몸을 모로 눕히고 얼굴 쪽에 휴지를 깔아 주고 입에 기구를 넣을 둥그런 고정물을 채웠다. 다리 자세도 만들어 주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나는 도살장에 끌려온 소처럼 순하고 무력하게 눈만 꿈뻑였다.

마취제 들어갑니다.

어쩐지 나를 급습했던 공포감이, 불길한 상상이 스멀스멀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남편이 밖에 있어요... 그 별거 아닌 평범한 대답이 마취에 들어가는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석규 김서형 주연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라는 왓차 오리지널 시리즈도 한 번쯤 부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출판사 대표 정다정과 작가이며 인문학자인 강창욱은 결혼 후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상을 견딜 수 없어 이혼을 결심한다. 이혼을 앞두고 별거 중에 정다정은 대장암 말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정다정은 언젠가는 간병시설로 들어가겠지만 그전까지는 환자처럼 안 살고 싶다며 강창욱에게 그동안 자신을 케어해 달라고 부탁하고 강창욱은 정다정의 부탁을 들어준다. 라면만 겨우 끓일 줄 알았던 강창욱은 이후 아내 정다정을 위해 부엌에 선다.  

이 드라마는 강창래 작가의 실화를 담은 작품으로 암투병 중인 아내를 위해 했던 요리레시피를 글로 엮은 동명의 책이 원작이라고 한다.

"아빠 엄마랑 이혼하려고 했잖아요... 의리 같은 건가요?"

이혼을 하겠다고 집을 나갔다가 엄마의 암투병 케어를 위해 다시 돌아온 강창욱에게 아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강창욱은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가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아빠였던 것 같아... 엄마 아빠는... 그런 사이야..."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나는 지금 건강검진과  주고받은 똥 얘기와 수면 위내시경 때의 기억과 드라마까지 끌어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가..,


비혼주의자가 늘어나는 연애는 필수이고 결혼이 선택이라는 이 시대에 굳이 결혼을 장려하려는 뜻은 전혀 없다. 그냥 이 삭막하고 허허로운 세상에 서로의 똥 이야기를 무람없이 하면서 키득댈 수도 있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들고 늙은 자신의 마지막을 부탁할 수 있는 남편이라는, 아내라는 단 한 사람이 있다는 건 생각보다 꽤 많은 위로가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나마 편안한 관계가 되기까지 너무너무 힘들었다는... 징글징글하게도 싸웠다는... 너무나 많은 고비를 넘어왔다는... 앞으로  힘든 고비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말도 하고 싶은 것 같다.

 드라마의 강창욱도 말했다. 서로  사랑했는데,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일상을 함께 하기가 너무 힘들었다고...

그리고 마지막을 자기에게 부탁해 줘서... 돌보게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이 드라마가 너무 괜찮아서 남편에게 한번 보라고 했다. 그러나 한 달이 넘은 것 같은데 아직 안 봤다. 볼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소파에 길게 누워 동물들이 나와서 물어뜯고 죽고 죽이는 영상이나 코미디 재방송을  보며 혼자 낄낄거리기만 한다.  그럴 시간에 내가 말했던 그 드라마 한번 보라고, 언젠가 당신 닮았다고 했다가 친구들에게 몰매를 맞을 뻔한  배우 한석규가 나온다고 해도 알았다고 건성으로 대답만 할 뿐이다. 정말 남편이 정말  정말 맘에 안 든다.  그래도 이렇게 살고 있다. 정말 너무너무 징글징글하다. 그리고  아주 조금은... 뜻 없이 애틋하다.


#부부

#건강검진

#분변잠혈검사

#오늘은좀매울지도몰라

#한석규김서형


이전 23화 요즘 나는 자주 남편을 크게 웃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