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가에서 나는 달빛에 비친 맨드라미를 보고 있었다. 양평에 사는 금희한테서 전화가 왔다. 숨넘어가는 목소리였다.
“어 언니, 수제 차 주문이 밀렸어! 지금 와 줄 수 있어?”
“이 늦은 시간에? 일복 터졌네.”
얼마 전 나는 남한산성 산밑 폐가를 얻어 이사를 왔다. ‘될 대로 돼라’ 했지만 내심 불안한 나날이었다. 빈털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방이 사거리에서 자영업을 하다가 폐업을 했다.
밤늦게 양평으로 머리카락을 날리며 달렸다. 밤 12시 넘어 금희네 집에 도착했다. 금희는 나무 상자 속에서 병을 몽땅 끄집어 내놨다. 생강차와 우엉차를 만드는 일이었다. 우리는 내일 일할 순서를 정하고 두 시 넘어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어제 강 따라 달려오던 통쾌함은 잠시였다. 일이 간단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투명 유리병이 몇백 개였다. 금희가 알려주는 대로 일을 시작했다.
우선 손바닥만 한 투명 유리병을 큰 솥에서 끓는 물에 넣었다. 끓는 물에서 유리병을 건져내어 싱크대에 나란히 올려놓고 식혔다. 싱크대 설거지통에 식은 유리병을 집어넣고 이물질을 솔로 닦았다. 물이 찬 유리병은 스스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물이 차지 않은 병은 손으로 눌러 가라앉혔다. 빈 병은 물이 차면서 꼬르륵 소리를 냈다. 물에 떠 있는 병들이 마음을 못 잡고 붕 떠 있는 나 같았다. 나는 병을 거꾸로 바닥에 세워 물기 하나 없이 말렸다.
새벽까지 술 마시고 친구들과 놀 때는 날 새는 줄 몰랐다. 이렇게 새벽까지 일 다운 일을 한 것은 처음이라 힘들었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 거야?” 내가 말했다.
금희는 납품 날짜를 꼭 지켜야 한다며 나를 압박했다.
내가 오기 전부터 사십 대 후반의 아줌마가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왔다. 그녀의 아들은 거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믹서기에 생강을 갈았다. 아이는 얌전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넌 꿈이 뭐야? 좋아하는 과목이 뭐야?” 몇 시간째 앉아있는 게 지겹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6시에 퇴근했다.
오전이 지나자 나는 일의 순서를 금방 알았다.
나는 물에 불린 우엉을 큐브 모양으로 3cm로 잘라 건조기에 말렸다. 건조한 우엉은 팬에서 자주 뒤집어도 안 되고 오래 있으면 타버렸다. 잡담도 할 수 없었다. 팬에서 타지 않게 집중했다. 고양이들은 밥은 먹었을까, 청소기 고치러 가야 하는데, 술자리 모임을 취소할까, 안과 예약 다음 주로 미룰까. 복잡했던 머릿속이 찬물로 씻어낸 듯 깨끗해졌다. 그것도 잠시였다.
나는 우엉을 9번을 덖고 식혔다가 말렸다. 다 덖은 우엉을 커피 그라인더로 갈았다. 우엉가루를 커피 내리듯이 내리며 우엉차 일이 끝났다. 거의 마무리 단계에 다다랐다. 눈꺼풀이 풀렸다.
날것인 우엉이 병 속으로 흘러내릴 때, 마치 수십 번 퇴고한 문장 같았다.
생강즙을 병에 담는 일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생강차 때문에 일이 언제 끝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우엉차처럼 조리개를 타고 병 속으로 졸졸 흐르지 않고 생강차는 똑똑 떨어졌다. 병 입구가 작아 조리개를 타고 속으로 떨어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쁜 것도 좋지만 병 입구 좀 큰 것으로 하지” 나는 투덜거렸다.
“병이 이뻐야 속도 이뻐 보이지 않겠어!” 금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겉도 이쁘고 속도 이쁘면 최고지.”
겉은 요란하고 속은 텅 비었거나, 겉은 별 볼 일 없는데 안은 꽉 차 있는 것도 있다. 요즈음 겉과 속이 같은 것을 찾는 게 쉽지 않다.
나는 허리를 뒤틀다가 쪼그리고 앉았다. 동작을 바꿀 때마다 일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았다. 지겨워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수시로 자세를 바꾸면서 나도 모르게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갔다. 그래도 우엉차보다 시간이 두 배 걸렸다. 생강즙이 흘러내려 손에 닿았다. 사탕이 손에 묻었을 때처럼 찐득거림이 지금도 몸이 오그라든다. ‘끝이 없는 일이 어디 있겄어!’ 오기가 생겼다. 얼마쯤 지났을까. 투명했던 유리병들이 노란색으로 채워졌다. 뿌듯함도 잠시 감상에 젖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물수건으로 병을 일일이 닦았다. 병을 마루에 일렬로 뉘어놓고 순식간에 라벨을 붙였다. 생강차 병이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채워질 때 지겨웠던 시간이 달맞이꽃이 공터를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밤하늘에 보름달이 중천에 떠올랐다.
“언니, 어리바리할 줄 알았는데 일 좀 하네!” 금희가 말했다.
“일의 순서를 알면 금방 허지”
“언니가 나한테서 와서 일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금희는 내가 가게 문 닫기 전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을 나도 요새 실감해.”
아침 6시부터 새벽 세 시까지 몇백 개를 만들었다. 돈으로 계산하면 7백만 원어 치라고 했다.
나는 하품을 했다. 오랜만에 배고픔이 느껴졌다.
“아이고 밥맛없다는 사람 전부 이 일 시켜야겠네.”
요즈음 밥맛이 없던 내가 한마디 했다.
일이 단순반복이라 나는 좀 멍한 상태가 되었다. 그냥 집에 간다고 할까 고민도 했었다. 일당을 받는 일이라 요령을 피울 수도 없었다. 어깨는 뻐근하고 다리는 저리고 고개도 내 고개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뚜두둑 꺾일 것 같았다.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에 갔다. 변기에 앉아서 오만 생각을 했다. 쥐뿔도 가진 게 없으면서 띵가띵가 하면서 대충 살았다. 나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부러 힘든 일을 굳이 찾아서 하지 않았다. 남 놀 때 더 놀고 남 일할 때 덜 일 하고 설렁설렁 살았다. 그러니 지금 이 오밤중에 생고생하는 거지. 빌어먹을 일을 안 하는 자는 허공에 숟가락질해야 하고, 일하는 자만이 목구멍에 밥을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새벽이었다. 화장실 밖에 별이 반짝거렸다.
마지막 날이다. 새벽 세 시에 일이 끝났다. 금희와 소주를 한잔하기로 했다. 나는 길 건너 편의점으로 소주를 사러 갔다. 자동차 불빛이 어둠 속을 달렸다. 무거운 일을 끝내고 나니 밤공기가 감미로웠다. 창고 귀퉁이 어둠을 발로 제치자 토끼풀이 떨어져 나갔다. 어둠 속에서도 토끼풀이 눈에 들어왔다. 토끼풀을 뜯어 손목에 묶었다. 소주, 오징어, 땅콩 볼을 사 들고 돌아왔다.
금희는 뒷마당 데크에 자리를 펴놨다. 상위에 길게 잘린 오이와 쭉쭉 찢어진 김치가 접시 위에 놓여있었다. 소주잔이 비워질 때마다 별들이 꾸벅꾸벅 졸았다. 자갈을 치고 돌아가는 물소리가 들렸다. 귀뚜라미 소리 들리고 새벽바람은 선선하다 못해 차가웠다. 금희는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언니, 내 손 너무 밉지? 손에 물 마를 날 없다 보니.”
“이쁘기만 허구만. 일하는 사람이 손이 이쁜 것도 문제지!”
나는 말을 끝내고 슬며시 손등을 엉덩이 밑으로 넣었다. 시계풀이 뭉개졌다. 금희의 손등 위로 바람이 부딪히며 지나갔다. 나는 ‘손이 예쁘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나는 고무장갑을 답답해서 끼지 않는다. 마사지도 받지 않고 핸드크림도 잘 바르지 않는다. 나는 친구들에게 타고난 것을 어쩌겠어하면서 자랑을 했었다. 오늘 밤은 그동안 놀고먹은 내 손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졸려 고개를 떨어트리면서도 술잔을 놓지 않았다. 나는 일과 술을 사랑하는 그녀의 태도를 배우기로 했다. 공손한 이 밤 술잔과 내 이야기를 받아주는 네 귀가 내 어깨에 가깝다.
취기가 올라서일까. 아들을 데리고 일하러 왔던 그녀가 떠올랐다. 금희는 내가 온 다음 날 그녀를 잘랐다. 손이 빠른 내가 왔으니 금희는 다음날 오던 아줌마를 내보냈다. 나는 금희의 지출을 줄여준다는 생각에 뿌듯했었다. 내가 일을 잘해서 그녀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그런데 내 ‘빠른 손’이 그 여자의 일자리를 뺏은 것이다. 유능함이 미덕은 아니다.
그녀가 그만둔 날 나는 보았다. 현관에서 아이는 말없이 운동화를 꾹꾹 눌러 신었다. 그녀는 앞코가 벗겨진 구두 뒤쪽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때 뭉툭한 손이 보였다. 그녀의 삶이 보였다.
분명 소주병이 정자세로 있었는데 쓰러져 있었다. 금희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윗도리를 벗어 금희 고개 밑에 깔아주고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앉아 끙끙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자다 깨니 변기에 앉은 채 잠이 들어있었다. 피곤하기는 했는가 보다. 나는 털레털레 밖으로 나왔다. 쭈그리고 자는 금희를 흔들어 깨웠다. 허공에 별들이 매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