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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품들의 사계 Nov 06. 2024

불량품들의 사계

가을 하늘아래 낮아지는 바람 147

가을 하늘 아래 낮아지는 바람      




“이번 배추가 마지막 일 줄 모르는데.”

성길 씨가 낮은 말투로 말했다. 쫓겨 갈 시간이 임박했다는 암시 같았다. 서글픈 마음과 새로운 곳에 가서 산다는 설렘이 그를 감상에 젖게 한 것 같다. 하지만 저 말이 쫓기는 쥐와 같이 성길 씨에게 내가 얼마나 비굴하게 굴었던가.

“맥주 한잔 할래요?”

밭에서 나와 바지를 털고 있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막걸리 마시까요?.”

나는 막걸리가 마시고 싶었다.

“아, 막걸리 끊었어요”

성길씨는 벌써 감상에 벗어났다.

“그럼 알아서 핫쑈”

나도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집에서 카드를 가지고 왔다.

“맛있는 거 사 와요.”

성길 씨는 들떠 있었다.  

“사장님, 우리 짜장면 시켜 먹으까요?”

성길씨는 내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래 얻어먹은 주제에 시키는 대로 하자. 카드 주면서 나에게 심부름시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얼음 타서 먹는 커피랑 캔 맥주 사세요. 나머지는 알아서 해요.”

성길씨는 술을 마셔야 인심이 후해지는데 오늘은 이상했다.


나는 살랑거리는 바람을 따라 싱싱 달렸다. 밭에 풀을 정리한 뒤라 배가 고팠다. 족발, 핫바. 캔 맥주 5개, 아이스커피 1개, 요구르트 1개 샀다. 편의점에 전자레인지를 돌려본 적 없는 나는 계산대에 있는 알바생에게 족발은 전자레인지에 돌려 달라고 했다.    

 

나는 총알처럼 집으로 와 카드와 영수증을 성길씨에게 주었다. 나는 먹을 것을 평상에 펼쳐놓았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둘이 나란히 평상에 앉았다. 각자 술을 따랐다. 성길씨가 맥주 세 캔 마시는 동안 나는 막걸리 한 잔도 안 마셨다. 내가 어지간하며 마시겠는데 안주로 하려고 사 온 족발이 너무 맛이 없었다. 사람 먹을 것을 팔아야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까불이에게 줬더니 냄새만 맡고 안 먹었다.

나는 요구르트를 들고 앞산을 쳐다보았다. 햇빛을 받은 나무이파리들은 숨이 찼다. 그래도 하늘이 높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성길씨는 LH 보상문제로 여동생들과 싸운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 둘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성길씨가 나에게 카드를 줬다는 것이 고마워서였다. 나는 남자가 여자에게 카드를 주면서 결재하라고 할 때 남자의 경제 무게를 느낀다. 오늘 살짝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평소 때보다 진지하게 들었다. 성길씨 말이 치즈 늘어나듯 너무 늘어졌다. 나는 뽑다 만 풀을 마무리해야 해서 핫바를 다 먹고 일어섰다. 눈치챈 성길씨도 남은 맥주 캔 두 개를 들고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 참 곤란하다. 그의 말을 더 들어주고 싶지만, 이주 이야기는 결론이 없는 말이고 내가 처음 들은 말도 아니다. 사 준 것 다 먹고 나니까 돌아서 자기 일만 하는 인정머리 없는 여자 취급할까 그래서 내가 공짜를 싫어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밭에 흙을 판판하게 고르고 돌을 골라냈다. 놀고 있는 땅이 아까워 농약사에 거름을 배달시켰다. 거름값만 오만 원이다, 직접 사려 가면 4, 5천 원 저렴하지만 싣고 와서 혼자 밭까지 나르고 나면 손발이 덜덜 떨려 평상에 누워야만 했었다.

“돈 오만 원 이까짓 것. 성길씨가 카드를 나에게 다 주었는디.”

그가 마음을 연 거 같아 불어오는 실바람에 마음이 설레었다. 신문에 나온 오늘의 내 운세가 뭐였지?    

 

2

다음날 성길 씨는 마당에서 나를 보자 대뜸 말을 건넸다.

“저기 심심한데 씨앗 사러 갈까요.”

“그럴까요.”

별말 없이 앞만 보고 운전을 하다가 내가 말을 꺼냈다.  

“나, 모기한테 물려 죽게 생겼었어요. 여름이 지났는디 더 지랄이어요.”     


하남 서부농협 근처에서 상추 모종과 쑥갓, 열무 씨앗을 샀다. 씨앗을 산 후 신장동에 있는 GS 마트로 출발했다. 성길씨는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바구니를 들었다. 바구니 안에 플라스틱 맥주, 계란, 닭강정을 집어넣었다. 성길씨는 나에게 바구니를 넘기면서 “ 뭐 하나 집으세요”라고 했다. 어제 카드 3만 5천 원을 긁은 게 생각났다. 천 원짜리 숙주나물 한 봉지 집어넣었다. 나는 바구니를 들고 성길씨를 따라다니다가 문득 ‘내 사랑’ 영화가 생각났다. 캐나다 화가 모드 루이스(1903-1970) 실화영화다. 운명처럼 만난 거친 성격의 남자 에버렛을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둘의 사랑이 물들어가는 과정이 정말 아름다워 눈물 콧물을 소매에 닦으면서 봤던 영화다. 그것도 부족해 닦은 눈물을 소파에 비비면서 봤었다. 그렇다고 성길 씨가 에버렛역을 했던 에단호크처럼 매력적이지 않다. 나도 여자주인공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나는 그만한 재주가 없다. 그게 잠시 머리를 스쳤을 뿐이다.  

   

시장을 본 후 차에 타려던 성길 씨는 나한테 잠깐 기다려주라고 했다. 약국으로 뛰어갔다. 모기 퇴치 약을 사 왔다. 만원이나 줬다고 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겉치레로 듣지 않고 있었다는 데 감격했다.

“옴매, 뭔 일 이단가.”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에단 호크여, 뭐여.’

우리는 다정 속도 120Km로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성길 씨가 상추 모종 12개를 떼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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