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또한 빛나는 인생이라고 말해주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공부를 했지만 토요일, 일요일은 쉬는 날이었다. 주말에는 보니와 보나를 끌고 산책을 하다가 집에 틀어박혀 누워있는게 다였다. 산책은 그냥 하는 일이 되어있었다. 그렇다고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민서의 의지라기보다 집에만 하루종일 있는 녀석들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문 앞에서 낑낑 소리를 내며 민서를 밖으로 끌어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최대한 단조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일상에 작은 변화를 준건 우연히 맞닿은 연락이었다. 곧 새해가 되니 다같이 모여야 한다고 결정한 건 연진이었다. 마침 연말에 부모님이 잠시 시골에 내려가 이틀 정도 집이 빈다며 다함께 모여 파티를 하자고 제안해왔다. 민서는 안가겠다고 결정해놓았지만 언젠가 혜진과 나눈 대화가 신경 쓰였다. ‘평생을 그렇게 살순 없어’혜진이 한 말이 계속 귓가를 멤돌았다.
하루는 혜진이 민서와 함께 공부를 하러 그녀의 집에 찾아와 연진의 연말파티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른 애들도 올 것 같아.”
“다른애들?”
“왜 있잖아, 중 1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
민서의 머릿 속에 몇몇 얼굴들이 스쳐지나갔다. 끔찍했던 학교폭력 사건 이후 전학을 간 학교에서 혜진, 연진, 현지를 만났다. 주로 모여 다닌 건 그 셋이었지만 붙임성 좋은 연진이 종종 다른 친구들을 데려와 놀기도 했었다. 그 중 몇몇을 파티에 초대하겠다는게 연진의 계획이었다. 연진의 계획을 듣자 민서는 더 가기 싫어져 얼굴을 찡그러트렸다. 그런 민서의 표정을 본 혜진이 민서를 빤히 바라보았다.
“갈꺼지?”
혜진이 물었다.“다른애들은 거의 일 년만에 만나는거잖아. 재밌을거야”하고 말을 덧붙였다.
“...생각해 볼게”
“‘생각해 볼게’가 아니라 간다고 해야지, 재밌을거야. 수정이도 온다더라.”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민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수정이가?”
“그래, 너 온다고 하니까 온다고하더라. 너랑 연락하고 싶은데, 바뀐 번호를 모른대. 너는 어떻게 바뀐 전화번호도 안알려주냐?”
수정은 민서에게 살갑게 대해주던 몇 안되는 반 친구 중 하나였다. 전학을 가고 학교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사소한 것들을 챙겨주던 다정한 아이였다.
그러나 민서가 결국 부적응 문제로 학교를 도망치듯 자퇴할 때, 핸드폰 번호를 바꾸며 연락이 끊겨 버렸다. 바뀐 번호는 가장 친한 삼인방에게만 알려준 터라, 같은 반 친구들은 아무도 민서와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티라고 해봤자, 배달음식을 잔뜩 시키고 TV에서 틀어주는 연말 영화를 틀어놓고 신나게 떠드는 것 정도 일테다. 사람들이 많으면 굳이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반은 가지 않을까? 무엇보다 민서는 수정이 보고 싶었다.
“알았어, 갈게”
“오기로 한거다? 당일 돼서 갑자기 안오면 안돼.”
수정이 온단 소식에 갑자기 마음을 바꾼 민서가 조금 서운한 듯 혜진이 으름장을 놓았다.
수정을 만날 생각에 민서는 조금 들떳다. 어떤 옷을 입고가면 좋을지 고민하며 자신의 무채색 옷장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머리가 조금 지저분한 것 같아 미용실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미용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오랜만에 거울로 본 자신의 모습은 마치 곰 같았다. 퉁퉁 부은 얼굴에, 살은 계속 불고 있었고, 온몸의 상처도 계속 늘고있었다. 학교를 자퇴하고 일 년 사이 많이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수정이 어떤 생각을 할지 난감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민서는 침울해지는 기분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혜진에게 꼭 가겠다 말했으니 이제 빼도박도 못하게 약속을 지켜야만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친구들은 아마 실망하고 돌아설지도 모른다. 부정적인 생각이 비약적으로 늘어만 갔다.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이 시간은 흘러만 갔고, 약속된 날이 되었다. 연진이 설레발을 치며 민서 대신 그녀의 부모님에게 하루 정도 자신의 집에서 민서가 자고 가도 돼는지, 얼마나 건전하게 놀 것인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며 허락을 받아내었다. 이미 그녀는 친구들 손에 이끌려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연진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이럴 거면 왜 옷장 앞에서 고민을 했는지 민서는 문득 들뜬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부끄러워졌다.
저녁 여섯 시 쯤 친구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진은 생각보다 많은 친구들을 불렀다. 민서, 혜진, 연진, 현지를 제외하고도 네 명이나 그녀의 집에 들어와 있었다. 그 중 절반은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었고, 절반은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혜진의 말로는 중학교 2학년 들어서 같은 반이 된 아이들이라고 했다. 수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서는 대충 아이들과 인사하고, 눈을 굴려가며 수정이 언제쯤 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눈치챈 듯 혜진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수정이는 늦는다고했어.”
민서는 조금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그정도로 좋으면 말이라도 해보지 그래.”
혜진이 툭 던진 한마디에 민서가 깜짝놀라 거의 소리치듯 대답했다.
“큰일나. 큰일날 소리 하지마.”
“그럼 애들하고 가서 좀 놀아, 저기 채연이 보이지? 아까부터 니 안부를 묻고 싶어하는데 니가 가만히 있으니까 무슨일 있냐고 나한테 와서 묻더라.”
민서는 혜진의 손에 이끌려 채연에게로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오랜만이네.”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인사였다.
“잘 지냈어? 조금...조금 살이 쪘네, 그래도 말랐을 때 보다는 훨씬 좋아보인다.”
채연이 민서를 보고 말했다. 민서가 학교를 자퇴 할 때쯤에 그녀는 뼈위에 가죽을 올려놓은 듯 말랐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채연은 지금 민서의 모습이 조금 낯선 듯 계속해서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민서는 그 시선이 거북해 혜진의 뒤로 거의 숨다싶이 했다.
“응, 좀, 살쪘지. 요즘 아주 잘 먹고 있거든.”
“다들 가끔 네 얘길해. 잘 지내는지 궁금해하거든. 왜, 너 전화번호 바꿔버려서 아무하고도 연락 안하잖아.”
채연이 조금 서운한 듯 말했다.
“응, 조금 쉬고 싶었거든, 많이 안좋아서. 미안해.”
“미안할 거 까지야, 그래도 괜찮으면 바뀐 번호 알려줘, 수정이 기억하지? 수정이도 오늘 온다는데, 다음에 셋이 만나자.”
채연이 핸드폰을 내밀려 말했다. 민서는 조금 고민하다 채연의 휴대폰에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꾹꾹 눌러 입력하고는 다시 돌려주었다. 그런 민서를 가만히 지켜보던 채연이 민서에게만 들릴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수정이가 널 많이 보고 싶어해. 아직 수정이 좋아해?”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고는 다른 아이들 틈으로 사라졌다.
민서는 한동안 멍하니 구석에 앉아 과거를 회상했다. 혜진, 연진, 현지는 전학가자 마자 만난 첫 친구였다. 그녀들은 전학 첫날부터 민서에게 관심을 보이고는 끝없이 그녀를 귀찮게해 친구가 되었다. 셋은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한 오래된 친구사이라고 했다. 혜진은 큰언니 같은 역할이었고, 현지는 특유의 털털함으로 소심한 민서에게 언제나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연진은 그녀만의 넉살과 쾌활함으로 무리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넷은 언제나 함께 몰려다녔다. 민서가 아프거나 트라우마로 삽화를 경험하며 주저앉으면 셋은 언제나 말없이 민서의 곁을 지켜주었다. 민서가 자퇴를 결심한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도 계속 만나자며 도원결의같은 비장함으로 넷은 똘똘 뭉쳤었다.
그에 반해 채연과 수정은 같은 반에서 가끔 함께 노는 정도의 친구로 연진이 소개시켜준 친구들이었다. 삼인방은 공부에는 성실하지 않았으므로, 주로 채연과 수정은 공부에 관련된 도움을 주었다. 체육복을 빌려주거나, 결석이 잦은 민서를 위해 필기노트를 빌려주거나, 교과서를 보여주는 등 작고 사소한 배려와 도움을 주었다. 셋이 자주 모여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 채연은 수정을 향한 민서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 채연에게 비밀을 틀켰을 때, 민서는 과호흡이 올정도로 적잖이 당황했지만, 채연은 왠지 능숙하게 민서를 달래고 비밀을 꼭 지키겠다고 약속했었다.
약속한 뒤로 채연은 정말 그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물론, 당사자인 민서와 수정 앞에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 민서에게 먼저 그 화제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제와서 채연이 먼저 그 화재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니 민서는 조금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당황한 기분을 진정시키려 민서는 구석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친구들을 구경했다. 연진과 현지는 ‘피자 많이 접어먹기’ 내기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혜진은 큰소리로 그 둘이 토를 할지도 모른다며 말리고 있었고, 채연은 그 바보 같은 광경을 보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내기에 서로 편을 갈라 나눠지며 소란스럽게 누가 이길지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다. 민서도 속으로 ‘아마 현지가 이길 거야’하며 조용히 내기를 걸었다. 친구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초인종이 울렸고, 민서의 심장은 다시 빠르게 뛰었다.
수정이 도착했다.
민서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숨을 만한 곳은 없었고, 조용히 구석에서 연진이 한 손에 피자를 들고 수정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정은 여전히 예쁘장한 얼굴에 밝고, 쾌할한 모습으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민서를 발견한 그녀가 거침없이 민서에게로 다가왔다.
“민서야.”
그녀가 민서의 이름을 불렀다. 민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오랜만이네.”
민서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수정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했다.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수정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정말, 오랜만이다. 거의 일 년만이지? 잘 지냈어? 어떻게 지내?”
수정이 그녀 답지 않게 질문을 마구 퍼부으며 민서의 옆자리에 앉았다. 민서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TV에서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연속으로 틀어주고 있었다.
“그냥...공부하고, 요즘엔 산책도 해. 보니 기억해? 보니랑 보나라고 강아지가 한 마리 더 생겼어. 그래서 보니랑, 보나랑 함께 산책하거나... 공부하거나... 그게 다야.”
민서는 횡설수설 대며 자신의 단조로운 일상을 수정에게 공유했다. 저 멀리서 채연이 흥미로운 듯 그녀들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잘 지내면 됐어, 그게, 너랑 연락이 안돼서 걱정했어. 너 학교 그만두자마자 번호 바뀌었는데 알려주지도 않고, 연진이한테 물어볼까도 하다가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굳이 물어보지 않았어.”
수정도 서운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채연과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게... 정신이 없었어...”
민서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연진이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민서는 말없이 핸드폰을 받아 꾹꾹 눌러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입력했다.
“이제 연락 자주해야해.”
수정이 베시시 웃어보였다. 민서는 자꾸만 빨개지는 자신의 얼굴을 원망하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수정은 민서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민서의 걱정과 달리 그녀의 변한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수정은 이전과 다름없이 그녀를 대했다. 그런 수정의 모습에 민서는 조금 마음이 놓여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