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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 26화

바이올린 제작가가 되기로 하였다

by 현동인

세실리아와 결별한 뒤, 나는 직업들을 여러 번 바꾸었다.


아무래도 구두일을 하는 "족쟁이"는 사회적으로 볼 때 그리 내세울만한 직업은 아니었기에 나는 다시 전에 일하던 전자계통으로 직장을 옮겨서 작은 탁상용 TV를 제작 수출하는 회사의 생산과 주임으로 2년 동안 일하였다.
전자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족쟁이"라는 하대를 받는 구두일 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많은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는 일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내게 주었다.

여자들이 월등히 많은 전자회사의 특성상 여자들을 관리하며 일하는 게 남자들보다는 훨씬 더 어려웠기에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관리자 말고 나 혼자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직업을 다시 찾 던 중, 마침 친구 형님이 운영하는 금은세공 일에 관심이 쏠렸다.
왠지 모르게 금은세공 일은 귀티가 나는 직업처럼 보였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몇 번 거절을 당하다가 겨우 친구형님의 허락을 받아서 일을 하게 되었다.

금과 은을 녹여서 틀에 부어 반지와 팔찌 목걸이 형상을 만들면 그것을 세밀하게 깎고 다듬고 가공해서 반짝반짝 광이 나는 각종 반지와 목걸이들을 완성을 시키는데 나는 조각 파트에서 일하였다. 즉~반지나 목걸이 팔찌등에 여러 문양이나 그림들을 새겨놓는 일이었는데 이것을 배우기가 처음에는 매우 어려웠지만 많은 연습 끝에 나도 기술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전혀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 적성에도 아주 잘 맞았다.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는 게 아닌, 그저 내게 주어진 일들만 잘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야말로 내게 맞는 직업을 찾았다고 여기며 5년 동안이나 열심히 일했었는데 산의 정상을 오르기 전에는 산 주위에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는지 잘 모르지만 정상에 올라서 보면 산 아래가 훤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이 계통 역시 어느 정도 정상에 올라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미래가 확연하게 보였다. 나이가 많으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을 빠릿빠릿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손이 굼뜨다 보니 일을 하는데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지 금은세공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회 일들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계통 일이든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우대받는 직종은 없을 것이다.
나이가 많아도 당당하게 자기 경력을 과시하면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은 없을까 고민하던 중,
아주 우연하게 "스트라디바리우스 문을 열어주세요"라는 단편 드라마를 TV에서 보게 되었다.

바이올린과 첼로 같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들은 현악기제작의 거장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대부분 알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인물이지만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 첼로는 현재도 세계 최고의 악기로 불릴 정도로 연주가들이라면 꼭 갖고 싶은 악기로 정평이 나있지만 가격이 300억 원이나 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비싼 악기로도 유명하다.
별것 없는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이란 악기가 왜 이렇게 비싼 것인지는 그것을 만든 장인의 혼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으로도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제작한 바이올린은 절대로 만들 수가 없다.
장인의 혼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트라디 바리우스는 92세까지 장수하면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제작했다고 전해진다.

드라마 내용은 무명 악기 제작자였던 한 인물이 세계적인 명장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연기했었는데 나는 마치 귀신에 홀리듯 그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바이올린 제작가? 너무도 멋진 직업 아닌가?
음악을 좋아했던 나는 비록 바이올린은 아니지만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었고
무엇이든 만드는데 소질이 있던 나에게 바이올린 제작가란 직업은 내게 아주 잘 어울릴 것이다.
만약 내가 바이올린제작가가 된다면 나는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악기를 만들면서 살 수 있게 되겠지.

바이올린 제작은 재능도 뛰어나야겠지만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노하우를 쌓아야 할 것이다. 나도 세계적인 거장 "스트라디바리우스"가 되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내 나이 36세에 바이올린 제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문제는... 악기 제작을 배우려면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고향이면서 악기제작의 본 고장인 이태리로 유학을 가야 하는데 그때 내 형편상으론 도저히 유학을 다녀올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악기제작을 배우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 생각되어서 전화번호부를 뒤져 악기제작가를 찾아보았다.그중 한 분이 눈에 띄어서 전화로 문의해 보았지만 한 마디로 거절을 당하였다.당연하지 않은가? 웬 생판 모르는 녀석이 다짜고짜 전화를 하고선 바이올린 제작을 가르쳐 달라고 하니 누가 선뜻 허락해 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포기하지 않고 거의 매일처럼 그분께 매달리다시피 사정을 해서 겨우 허락을 받게 되었다.

한 마디로 그분의 연수생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를 가르치겠다는 스승님은 이태리가 아닌 미국 시카고에서 바이올린 제작을 공부하고 오신 분이었는데 50 후반의 연세에 풍채가 좋으시고 인상이 매우 엄격해 보이셨다.물론 공짜로 악기 제작을 배우는 것은 아니고 학원비 형식으로 매달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했지만 내가 바이올린 제작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에 나는 비용이 얼마가 들더라도 반드시 배워야 했다.
나의 평생 직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겨우 잡았는데 그깢 돈이 문제겠는가?

바이올린 제작을 공부하기 위해 그동안 모아 놓았던 돈을 다 털어서 바이올린 제작공부를 시작하였지만 수중에 있었던 돈들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술술 빠져나가듯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닥을 드러냈다.악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연장과 기계, 제작에 쓰이는 나무 값이 워낙 비쌌기 때문이었다.결국, 나는 공부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밤에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아야 했었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결국 찾아낸 아르바이트직이 영업용 택시를 모는 일이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하여도 운전은 생 초보자였다.면허증은 1990년에 취득해 놓았지만 바이올린제작 공부를 시작했을 당시 1996년까지 단 한 번도 승용차핸들 한번 잡아보지도 못했던 내게 영업용 택시운전은 가당치도 않았다.적어도 택시일은 베테랑 운전자들이나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악기제작공부를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나로서는 영업용 택시가 유일한 선택이었다. 낮에 공부하고 밤에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입 또한 여느 아르바이트직에 비해서 매우 좋은 편이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영업용 택시 일에 뛰어들기로 했다.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그때 무슨 용기로 택시운전을 할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일단, 운전을 먼저 배워야 했기에 내 절친으로부터 르망승용차를 하루 빌려서 춘천을 다녀왔다.
물론 내 옆자리에는 비록 애인은 아니지만 나를 오빠처럼 잘 따르는

성당 청년회 아가씨를 태우고 달렸는데 수퍼왕초보자인 내게 차를 빌려준 친구나, 그런 나를 좋다고 따라온 여자나
둘 다 정신이 헷가닥 돌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나 만큼이나 무모했었다.

그 당시 차들은 승용차들도 자동이 아닌 모두 스틱이었다.즉~클러치를 왼발로 밟고 1단, 2단, 3단, 4단, 5단, 기어를 오른손으로 변속하면서 운전을 하였기에 자칫하면 시동을 꺼뜨리기 일쑤였다.우리들은 그렇게 르망승용차 시동을 수도 없이 꺼뜨려가면서 춘천을 하루 돌고 왔었는데 그것이 내가 영업용 택시를 몰기 전, 자동차 운전 경력의 전부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라고 했듯이 나는 그다음 날로 영업용 택시 회사에 입사서류를 냈었고 운전을 하지 않아서 사고 경력이 없었던 나를 택시회사는 아무런 의심 없이 택시기사로 채용하였다.
그렇게 나는 팔자에도 없었던 택시기사로 핸들을 잡게 되었는데 나는 결과적으론 택시를 하면서
운전을 배웠다.그때 내 차를 탔던 승객들은 저승의 문턱을 왔다 갔다 했다는 것도 모른 체 무슨 택시 기사가 운전을 이렇게 개떡 같이 하나? 고개만 갸우뚱거렸을 뿐, 내가 왕초보 운전자였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영업용 택시를 첨 몰고 집에 왔을 때 어머님의 한 마디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뒤로 넘어갔다.

얘야~ 택시 뒷 유리창에 "왕초보운전"이라고 커다랗게 써 붙이고 운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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