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를 만났지만
남자에게 있어서 직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나 위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높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졸업해서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장에서 일하기를 원한다.
물론 대한민국 사회가 민주화가 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어도
직업의 귀천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런데 나 같은 인간은 도무지 머리가 따라주지 않으니 공부를 잘해서 그런 엘리트 직업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한 마디로 마이너리그에서 벗어날 수가 없던 찰나 그런 내게 바이올린 제작가란 타이틀은 어두운 구름 속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 빛이었다.
만약 내가 "스트라디바리우스"와 같은 거장이 될 수만 있다면 나는 단 숨에
마이너리그에서 메이저리그로 도약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나는 36세에 바이올린 제작공부와 영업용 택시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시작하였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것도 벅찬데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게 된 나의 몸은 엄청난 부하에 시달렸다.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바이올린 제작 공부와 야간에 택시일을 병행하다 보니 잠자는 시간은 하루에 고작 3시간 정도밖에 없었다.
얼마나 몸이 고단했던지 밤에 택시일하다가 신호등에 걸려서 잠시 브레이크를 밟고 있으면
분명 차는 가만히 서있는 상태였지만 마치 뒤로 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것은 과로사 전조 현상이다.
이 상태로 계속 일을 하다가는 과로사할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몸이 극도로 피곤할 때는 과로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 택시를 세워놓고 잠을 자야만 했다.
택시 일과 바이올린제작 공부 과정은 책으로도 족히 몇 권은 쓸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음 기회에. 바이올린 제작 공부를 하게 되면서 성당이든, 택시 안에서든, 여자 만나는 일이 더 많아졌다. 바이올린 제작가라고 하면 여자들이 굉장히 신기하게 여기면서 호기심을 갖기 때문이다. 내 택시를 승객으로 탄 여자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바이올린 제작가라고 하면 어떤 여성은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자고 까지 하였다.
물론 그 여자와는 만나서 결혼까지 생각할 단계까지도 발전했었지만 그 과정을 다 쓸 수는 없다. 연재글 "결혼? 쉬운 줄 알았더니 머나먼 길이었다"를 30편으로 마무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 여자를 처음 만나게 된 곳은 성당 사무실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새로 채용된 사무실 직원이었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 대해 호감을 갖는 시간은 1초도 안될 정도로 매우 짧은 편이다.
여자를 보는 순간에 호감, 비호감으로 눈에 확 들어오는데 그녀를 처음 보자마자 나는 그만 정신줄을 놓고 말았다.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우윳빛 하얀 피부, 호수처럼 맑고 큰 눈, 글래머스한 몸매, 계란형 얼굴, 언뜻 보아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마치 백설공주를 보는 것 같았다.
그녀를 보는 순간 내 가슴은 또다시 커다란 파도가 요동쳤다. 그때 내 나이 38살, 40을 코 앞에 두고 있었지만 레퍼토리는 많아도 히트곡 하나 없는 무명가수처럼 무수히 많은 여자들을 만났었지만 결혼할 여자 하나 잡지 못했던 나는 그녀를 보고 또 홀딱 반했다. 내가 누구인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무조건 들이대는 작업의 달인 아닌가?
나는 즉시, 그녀가 있는 사무실로 가서 물 한잔을 달라고 하자 여자는 생수기에서 물 한잔을 컵에 받아 내게 건네면서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으레 껏 몸에 밴 친절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빛의 속도로 여자에게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받아 마시고는 밖으로 나가서 공중 전화기로 작업을 시도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맑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내 가슴은 파도를 넘어 태풍이 휘 몰아쳤다.
내가 여자에게 무슨 말로 작업을 걸었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동안 여자들과 만나면서 갈고 닦은 나만의 노 하우를
총 동원하였다. 온갖 사기성 멘트와 감언이설을 남발한 끝에 여자와 데이트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처음 본 여자에게 전화로 작업을 걸어서 데이트 약속을 받아냈다? 역시 나는 "카사노바"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 한 번의 작업으로 여자를 나오게 할 수 있는 남자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하하하!~
아무리 많은 여자들과 만나고 헤어졌어도 처음 여자를 만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처음 보는 남녀는 비록 수많은 다른 이성들과 연습을 했을지라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다.
여자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나의 머릿속은 그녀가 어떤 성격인지 취향은 어떤지 온갖 상념으로 가득 차 있을 즈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여자를 보고는 순간적으로 위축이 되었다. 하얀 정장에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이쁜 데다가 키가 엄청 커 보였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고는 키가 큰 줄은 몰랐는데 나보다 키가 더 큰 것이다.
게다가 미인이면서 글래머스한 몸매의 여자와 비교해 보면 나란 인간은 내세울 게 전혀 없었다.
그녀가 백설공주라면 나는 일곱 난쟁이 중 한 명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위축되지 말자고 마인드컨트롤을 하였다.
여자에게 내세울 게 없으면 당당한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 앞에서 여유 있고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였지만 그녀는 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사무실에서 상냥한 모습을 보았을 때는 성격이 밝은 여자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성격이 밝은 여자는 잘 웃어주기 때문에 대화하기가 편하고 쉽게 친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여자는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친밀감을 이끌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는 긴장과 경계심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많은 개그가 필요하다. 재밌고 웃기는 얘기들을 많이 해주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긴장감을 풀면서 경계가 느슨해진다. 여자 앞에서 나는 그동안 알고 축적해 놓았던 온갖 개그들을 총 동원해서 그녀를 웃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웬걸? 여자는 심각한 표정만 지을 뿐, 전혀 웃지를 않는 것이다.
내가 날리는 개그들을 여자는 다큐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이상하다... 이 정도 개그면 여자가 배꼽을 잡고 웃어야 하는데 그래서 어쨌다는 건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으니 나는 당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자와의 첫 번째 만남은 별 다른 소득 없이 나 혼자서만 고장 난 녹음기가 되었다.
남녀관계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는데 첫 단추를 아예 꿰지를 못했으니 두 번째 단추라도 잘 꿰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여자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이 들뜨거나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여자는 나와 카페에 있으면서도 차만 홀짝 거리고 마실뿐 제대로 된 말 한마디 하지도 않았다.
이제껏 많은 여자들을 만났었지만 내 매뉴얼에 없는 이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근데 희한한 것은 내가 만나자고 하면 여자는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났지만 역시나
나 혼자만 열심히 떠들고 여자는 내 얘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세 번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녀의 세례명이"마르타"라는 것과 육 남매 중, 여자형제 중에서 둘째라는 것,
두 명의 오빠들이 있고 언니와 두 여동생이 있으며 엄마는 중학교 교사 출신이고 아빠는 놀랍게도 신학생이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가톨릭 신학생으로 공부하고 있었을 때 그녀 엄마와 만나서 신부가 되기를 포기하고 결혼했다는 것이다. 좀 특이한 가정사인데 이것이 내가 여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였다. 네 번째 만남에서 여자는 내게 그만 만나자는 결별 통지를 하였다.
나는 여자에게 차일 것이란 느낌이 들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결별선언을 듣고도 별로 놀라거나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몇 번 만났을 뿐, 사귀었다고 할 수도 없는 사이었고 나에 대해 별 관심도 없는 여자를 계속해서 만난다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여겼었다.
백설공주면 뭐 하겠는가? 나를 일곱 난쟁이 중 한 명쯤으로 여긴다면 나도 더 이상 그런 여자 만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헤어지자는 여자의 말을 듣고는 나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섰다.
마르타는 외모로만 보았을 땐 내 이상형의 여자이면서 매력적이었지만
나 싫다는 여자 쫓아다니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여자에 대한 집착 따위는 이제 내 인생노트에서 영원히 지워버렸다. 이렇게 나는 "마르타"라는 여자에게 또 차였다. 아마도 나는 전생에 축구공이었다가 인간으로 환생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수많은 여자들에게 차이면서 살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인생은 각본 없는 드라마라 하지 않는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볼 가치는 분명히 있다는 게 우리네 인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