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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닥노닥 Nov 20. 2023

나에게 부치는 연민의 서(書)

내 일상대로 국어사전

부치다

1. 모자라거나 미치지 못하다


부치다

1. 편지나 물건 따위를 일정한 수단이나 방법을 써서 상대에게로 보내다

2. 어떤 문제를 다른 곳이나 다른 기회로 넘기어 맡기다

3. 어떤 일을 거론하거나 문제 삼지 아니하는 상태에 있게 하다

4. 원고를 인쇄에 넘기다

5. 마음이나 정 따위를 다른 것에 의지하여 대신 나타내다

6. 먹고 자는 일을 제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하다

7. 어떤 행사나 특별한 날에 즈음하여 어떤 의견을 나타내다




탁탁탁, 힘에 부치는 지팡이 소리가 가까워졌다.

노인은 벤치에 주저앉아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입을 뗐다.



"슬픔은 불문(不問)에 부쳤었네.

그저 '자기 연민 빠진 나약한 사람 같으니라고' 하며,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남들이 보기 전에 얼른 눈물을 훔쳐댔지.

티를 내지 않으려 벅벅 살갗을 비벼댄 탓에 눈덩이가 발갛게 부어오르기도 했어.

이제는 그마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눈물은 나에게 생소한 존재가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어릴 적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놓아 울던 아이는 어디로 간 건지.

평생 뱉어낼 울부짖음은 그때 다 내어버린 건지도 모르겠어.

괜히 우리 곱디고운 할망만 고생했지.

원인도 모르고, 그칠 줄도 모르는 어린 손녀의 울음을 그저 묵묵히 감내하셔야 했으니 말이야.

'아마 제 부모가 보고 싶어 그러나 보다' 하고 짐작하셨으려나.


어느 여름의 고요한 밤, 나는 주홍빛의 골목길에 앉아 우두커니 어둠을 응시하던 할망의 곁을 서성였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지. 차오르는 눈물에, 울려대는 울음소리에 가려져있던 우리 할망의 슬픔을.

당신도 제 자식이 퍽이나 그리우셨을 테니 마음으로 울컥울컥 눈물을 흘리셨겠지.

일순간 밤하늘에 박혀있던 별들과의 거리처럼 삶이 아득해지고, 내 슬픔은 참으로 시시해져 버렸어.

시시해진 내 슬픔과 함께 보잘것없고 초라해진 내 눈물을 애써 감추기 시작했네.

그리고 나는 슬픔의 붉은빛이 나에게 닿지 못하도록 별과 나 사이에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냈네.

나는 슬픔을 올려다보지 않았고, 우는 법을 제 삶에서 잊어내다가 이내 잃어버렸네.


하루는 어떤 이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지.

'사람이라면 무릇 방어기제가 있을 법 한데, 당신은 스스로를 방어할 의지조차 없어 보인다'라고 말이지.

맞아. 어줍지 않게 제 한 몸 감싸대다가 놓쳐버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 무서워졌어.

내가 괜찮지 않을 때, 똑같이 혹은 더 괜찮지 않은 이들의 손을 놓쳐버리면 어쩌나 두려워졌어.

차라리 온몸이 피칠갑이 되어 비틀비틀 걸어가더라도 언제나 남들에게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싶었네.


그랬던 나도 이제 힘에 부치는 것 같아.

나이가 든 게지. 나이가 든 게야.

옹졸한 고집이든 비루한 자존심이든 스스로를 꽤나 갉아먹는 신념이었다는 건 부인할 수가 없구먼.

이제는 너무도 온건한 나의 슬픔이 참 밉네만, 어찌하겠는가?

앞으로 몇 해의 겨울을 더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는 나는 그저 내가 뜨거운 숨을 내쉴 수 있을 때 슬픔의 빛이 닿기를 바랄 뿐이네. 내가 슬픔의 빛을 받으면 나도 그때쯤은 누군가에게 기대어 엉엉 울어볼까 해.


그러나 자네만은 자신의 슬픔을 불문에 부치지 말게.

부디 스스로의 슬픔을 가벼이 여기지 말게.

슬픔의 푸른빛이 자네에게 닿을 수 있도록 곁을 주기도 하고, 어여삐 여겨 바라보고 돌보아주게.

자네의 슬픔을 단단히 가두고 있는 댐을 부수어 가물어버린 대지에 물을 적시게.

성실한 태양과 변덕스러운 바람으로 말미암아 결국 뭍은 드러나고 그 위에는 녹음이 우거지게 될 걸세.

그러니 돌아가게나. 천진한 슬픔으로. 난만한 설움으로."



노인은 벤치에서 삐그덕 대며 일어났다.

탁탁탁, 할망의 뒷모습을 퍽 닮은 노인이 멀어져 갔다.


사진: Unsplash 의 Christian Kap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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