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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아의 서랍 Apr 29. 2023

#9 할머니는 피자가 먹고 싶댔지

가장 보통의 유년

 “테레비에 나오는 저거, 이름이 뭐다냐?”

 방학을 맞아 시골집에 머물던 어느 밤, 여느 때와 같던 날 할머니는 물으셨다.

 “저거? 피자!”

 “피자? 무슨 맛이려나. 나중에 희진이가 크면 할머니한테 저거 사줘라.”

 할머니의 말에 내가 무슨 대답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알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기억이 지금까지도 종종 떠올라서, 한동안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으로 맺혀있다가 갈 일이 없을 테니까.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기억은 초등학교 때까지가 전부다. 두 분 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생을 달리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시골집은 바닷가 작은 마을에 있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분들이셨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러했듯 두 분 또한 한 마을에서 만나 결혼을 하셨고 작은 낚싯배 하나에 의지해 생을 꾸려나가셨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시기의 차이를 두고 처음 세상의 숨을 들이마셨던 그 마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우리 할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었다. 늘 할머니를 괴롭혔고 어린 나와 희수에게 수시로 못된 말을 했다. 할아버지는 남존여비 사상이 뼛속 깊이 박혀 있던 사람으로 언제나 말과 행동으로 그 생각을 드러냈다. 술까지 좋아해서 술에 잔뜩 취한 날에는 그런 모습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졌다. 피해는 오로지 할머니와 자식들의 몫이었고 손주였던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와 희수는 여자 손주라는 이유만으로 할아버지로부터, ‘결혼해서 남의 집에 가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손주들 중 유일하게 남자였던 막내 희민이는 ‘대를 이을 하나뿐인 자손’이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었다.     

 

 어렸을 때는 희민이만큼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장손이라고 챙겨주고 좋아해 주니까 나와 희수보다는 나은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우리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훈련소에서 군복 차림으로 급하게 나온 걔에게 장남이라며 상주 역할을 떠맡기는 분위기에 기겁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일체 접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를 뒷배 삼아 충분히 누나들에게 버릇없이 굴 수도 있었을 텐데 희민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나들 눈치를 봤으면 봤지. 아무튼 그런 말과 분위기는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좋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집에서 시골집까지는 차로 대략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로, 멀지 않은 거리 때문에 꽤 자주 시골집에 방문했다. 마을에 도착해 아빠가 운전하던 차에서 내리면 우리 셋은 할머니 집으로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뛰어 올라가면서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힘차게 외쳐댔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자발적으로 그랬는데, 조금 커서는 엄마가 시켜서 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손주들의 목소리에 “오야~ 우리 새끼들 왔어?”하고 반겨주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짐을 풀고 나면, 마침 어업에 나갈 참이던 두 분을 따라나서거나 우리끼리 바닷가로 놀러를 나가거나 했다. 둘 다 우리 엄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일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어업을 따라 나간 날에는 어김없이 옷에 낚싯배 기름때를 묻혀오고, 바닷가에 다녀온 날에는 꼭 신발이며 바짓단에 뻘을 묻혀왔기 때문이다. 뻘은 박박 문대면 지워지기라고 했지 낚싯배 기름때는 시커먼 것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낮에 그렇게 밖에서 한바탕 놀다가 들어오면 저녁에는 할머니 집 마당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작은 시골 마을이라 마을 주민 대다수가 바다나 밭에서 식재료를 자급자족했다. 조미료나 고기 같은 것을 구하려면 배차간격이 아주 긴 버스를 타고 시내까지 나가야 해서, 그런 사정을 잘 아는 엄마가 시골집에 올 때면 꼭 LA갈비나 돼지갈비 같은 것을 준비해 왔다. 엄마가 준비해 온 갈비를 할아버지가 석쇠를 이용해 마당 한쪽에서 굽고 계시면, 다른 한쪽에서는 아빠가 바다에서 구해 온 물고기나 해삼, 멍게 같은 것들을 횟감으로 손질했다. 석쇠에서 나는 연기 냄새를 맡으며 맛있게 구워진 고기와 먹기 좋게 손질된 해산물을 배부르게 먹고 나면 어느덧 해는 산 너머로 넘어가고 바닷가 시골 마을엔 깜깜한 어둠과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면 우리는 아빠를 졸라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서는, 구매점에서 사 온 다양한 종류의 불꽃놀이에 불을 붙여 이제 막 마을을 덮은 어둠과 정적을 깨곤 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우리 집에서는 하지 못했을 불꽃놀이를 우리 할머니 집에서만큼은 마음껏 했다.     






 밤에는 안방 바닥에 깔아놓은 두툼한 이불 위에서 잠들기 전까지 TV를 보았다. 한참 TV를 보고 있으면 할머니가 전에 잡아 놓은 고둥을 푹 삶아 냄비째로 들고 오셨다. 그러면 우리는 냄비 주변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왜인지 할머니 집에 많이 있던 일회용 주삿바늘로 고둥을 쏙쏙 빼먹었다. 크기가 너무 작아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여러 개를 발라내 먹어야 했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작은 고둥의 맛이다. 아마도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TV에 나온 피자를 가리키며 저게 무엇이냐고 물어보셨던 때가. 나중에 크면 피자를 사달라는 할머니의 말에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못할 만큼, 내가 그 작은 고둥살을 빼먹는다고 혈안이 되어있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건 아파트 단지 우리 집에서는 먹지 못하는 맛이었으니까. 그런데 참. 나는 할머니 덕분에 그런 맛을 수차례나 봤는데 우리 할머니는 티비에 나온 피자를 한 번도 못 먹어보셨으니…….      


 불꽃놀이가 끝나고 라이터로 만들어낸 불꽃이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원래 하늘을 수놓고 있던 작은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할머니는 그런 작은 별이었다. 껌껌한 하늘 안에서 작지만 아름답게, 묵묵히 반짝이던 별. 가끔 별을 쳐다보면 할머니와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래서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주삿바늘로 빼먹던 고둥의 맛은 이제 보지 못하겠지? 할머니가 앞으로도 쭉 피자를 못 먹어보는 것처럼. 아무래도 내가 부지런히 자라야 했나 보다.


어렸을 때 우리가 할머니집 유리문에 붙여놓은 포켓몬 판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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