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내기
희망은 희망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끔 필요한 위안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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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이미 탈진된 상태인 이들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
김영민,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가끔 인생의 허무를 견디지 못해 몸서리치는 때가 있다. 어차피 한 줌 흙으로 돌아갈 텐데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 혹시 내가 모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고 끝없이 탐색하게 될 때, 내가 아는 일상 속 현자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인생은 별 거 없으니 그냥 재미나게 살다 가면 된다고.
DNA 때문인지(아니면 MBTI 때문인지) 나는 그것이 그리도 어려웠다. 최악의 상태를 먼저 상상하고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완벽주의적 성향도 갖추고 있던 나였기에 인간은 선할 것이라고, 이 모든 것엔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성악설을 믿고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조물주가 감추어둔 커다란 의미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더 재미나게) 흘려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행복이 목표가 되어 무턱대고 잘 될 거라고 희망고문에 넘어갔다가 때론 더 큰 좌절과 절망에 휩싸이게 되기도 한다. 희망과 의미가 있어야만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게 될 때, 나보다 잘 나가(보이는 겉모습이 전부일 것이라고 믿게 하)는 이와 비교하며 내 인생이 너무 자주 하찮게 느껴질 때 오히려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허무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순간의 쾌락이 아닌 좀 더 여운이 긴(자기 파괴적이지 않은) 즐거움을 쫓을 때 마지막 날들이 덜 허무하지 않을까. 인생의 허무를 응시하고 공존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생을 더 잘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여전히 행동은 말보다 어렵고 그래서 어떻게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냐는 지에 뭉뚝한 답안조차 제시하기 힘들다. 단, 인생의 허무에 매몰되지 않으려면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오늘도 다짐할 뿐이다. 허무와 맞서 싸울 필요도, 못 본 척할 필요도, 억지로 소통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갑자기 셋방 주인이 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