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내게 물었던 날, 난 버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여정을 지켜보며, 나는 나의 여정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설소대 수술, 조음장애, 아빠의 부재, 느린 발달... 그 모든 시간을 지나 우리 아이는 홈스쿨이라는 낯선 길 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십대를 채워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글은 아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일을 고민하고, 기도하고,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한 엄마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엄마라서'가 아니라, '나도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쓰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 존경합니다. 함께 힘내요!
“야! 그만 좀 가만히 앉아 있어. 너 때문에 차 흔들리잖아!”
“언니 내가 흔드는 거 아냐. 나 사랑이랑 책 보고 있잖아”
처음엔 차 뒷좌석에 탄 여동생의 장난인 줄 알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차가, 아니, 내가 딛고 선 이 세상 전체가 거대한 젤리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눈앞의 빨간 후미등이 기괴한 춤을 추었고, 도로 양옆의 가로수는 마치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너울거렸다. 비현실적인 풍경 너머로, 카시트에 앉은 아이의 해맑은 재잘거림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짧지만 영원 같던 그 순간이 지나고, 동생이 소리쳤다.
“언니. 엄청 큰 지진이었대.... 뉴스에 난리 났어”
수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포항 지진이 있던 그날, 겨우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모든 것은 어제와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책상도, 책장의 책들도, 아이의 장난감들도.
하지만 그 무엇도 더 이상 그대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위태로워 보였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안 그래도 아이 문제와 내 삶의 시련들로 머릿속이 터질 듯 복잡했는데, 집 안을 가득 채운 물건들이 마치 내 머릿속처럼 어지럽게 느껴졌다.
그날 밤, 나는 잠 못 들고 꼬리를 무는 질문들에 갇혔다. "만약 우리가 조금 다른 길 위에 있었다면?", "만약 더 큰 지진이 온다면, 이 물건들은 나에게, 내 아이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불안 속에서 해답을 찾듯 책을 뒤적이다, 유루리 마이의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를 펼쳐 들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텅 빈 방의 사진들이 망치처럼 나를 내리쳤다. 텅 비어 있는데, 오히려 숨통이 트이는 고요함과 가벼운 자유가 느껴졌다. 사진들 앞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버리는 것이 두려워 끌어안고만 있었다. 추억이라는 핑계로, 언젠가 쓸모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행위가 아니었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내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묻고 답하는 과정이었다.
텅 빈 방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이란! 물론 아이를 키우는 현실에서 우리 집이 책 속 사진처럼 텅 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가 한 뼘씩 자라면서 내 삶의 짐도 함께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쉽게 가시진 않았다. ‘만약’이라는 상상은 끈질기게 나를 괴롭혔고,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하기도 했다. 이 작다면 작은 나라 어디에도 이제 지진 안전지대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한동안 깊은 멘붕에 빠졌다. 피할 곳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로 그 막다른 길에서 나는 답을 찾으려 애썼다. 피할 수 없다면, 살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이에게 진짜 물려주고 싶은 것은 근사한 옷이나 비싼 장난감이 아니었다. 소유의 무게보다 경험의 풍요로움을, 무너질 수 있는 것들보다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시간을 물려주고 싶었다.
젤리처럼 출렁이던 아스팔트의 감각은 여전히 생생하다. 사실 내 삶은 그날 이후로도 매일이 크고 작은 지진의 연속이다. 아이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고, 문득 덮쳐오는 외로움에 발밑이 꺼지는 기분. 뭐, 그래놓고 저녁 메뉴 걱정을 하는 나란 인간이지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흔들리는 세상 위에서, 흔들리는 마음으로, 이 서투른 글을. 완벽하게 단단해지는 법 같은 건 아마 평생 모를 것이다. 그저 어제보다 조금 덜 무너지고, 넘어져도 조금 더 가볍게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꽤나 엉망진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