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을 하다. 반차를 쓰다.

by U의 책장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 해 보니, 9시 20분이었습니다.


지각의 조짐이 있죠. 자고 일어났는데 유달리 개운한 잠, 눈부신 햇빛, 그리고 오늘은... 네, 전화벨이었죠.

울리는 전화벨을 들으면서 머릿속이 순식간에 비상사태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말하지? 출근하는데 1시간 40분 걸리는데? 지금 출근해봐야 오전 거의 날리는데?

결국 입에서 나온건 뻔한 변명 뿐이었습니다. '아파서 병원 왔는데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못 드렸네요'. 그리고 진료 보고 갈테니까 반차 처리 해 달라는 부탁까지.


병원은 정말로 가기로 했습니다. 최근 며칠간 속이 아려오는 증상이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요. 애매하게 남아버린 시간이기도 했고요.

9시 40분 쯤 도착해 본 병원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습니다. 앉을 자리가 겨우 있는 수준이었죠. 약간 놀랐어요. 평일 이 시간에 이렇게 사람이 많다고?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 동안 할 것도 없어서 다른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봤습니다. 아이를 달래는 중인 어머니, 시장 장사하기 전에 병원 들린 소매상, 잘 차려입은 중년 남성...

그 공간은만큼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습니다.


문득 내 세계가 어느새 이토록 좁아졌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평일에 항상 9시부터 18시까지 회사에 묶여서 일하고 있는 제 삶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니까요. 이 시간 병원이 붐비는 것을 보고 놀란 것은, 사실 나 자신이 그만큼 단조로운 틀에 박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반차를 쓰고 병원에 오지 않았다면 보이지 않았을 일이겠죠.

자신의 시간에 쫓겨 살아가다 보면 남을 잊어버리고, 그렇게 세계가 좁아지나 봅니다.


피곤해서 내장에 염증 생긴거 같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앉아 있는 사람 한 명이 전화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병원 진료만 받고 빠르게 출근할게요."

그 순간, 동질감이 마음 속에서 떠올랐습니다.

어쩐지 지각해서 반차를 썼다는 죄책감 같은 것이 약간 옅어졌어요.

반차도 회사 규정인데, 조금 더 여유 부려 볼까요? 이게 다 제 권리니까요.

기왕 늦은거, 점심은 천천히 햄버거 먹으면서 길거리 돌아다니는 사람들 구경하기로 하죠.

출근은 결국 해야겠지만,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는 내 속도에 맞춰서 걸어가 보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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