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언제부터 우리 역사에 등장했을까?
새 정부가 들어서며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 청와대는 북악산을 배경으로 시청과 종로, 을지로 등 도심 사무실 밀집 지역 북쪽에 위치하는데요. 청와대의 주소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 ‘광화문 1번지’로 정해졌으나, 광복 이듬해 주소가 한국식으로 바뀌며 ‘세종로 1번지’가 되었습니다.
청와대 부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고려의 이궁이 들어서면서입니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이었던 개경(現 북한 개성)과 서경(평양), 동경(경주) 세 곳을 삼경으로 두었는데요.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설치하고, 남경으로 삼았죠. 아쉽게도 남경 궁궐의 위치 및 규모와 관련된 정확한 자료와 유구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이후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 건국 당시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이 등장하면서였습니다. 1394년, 태조 이성계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만들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찾아보도록 하였는데요. 고려 숙종 때의 이궁 자리는 너무 좁아 궁궐을 새로 짓기는 어려우므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궁궐을 짓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였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궁궐이 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궁이 바로 경복궁이랍니다.
경복궁이 완성된 후 1426년(세종 8), 현재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 후원이 조성되었는데요.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의 이 지대는 ‘경무대(景武臺)’로 불리었으며, 서현정, 연무장, 과거 시험장이 만들어졌습니다. 한편,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대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270년 동안 방치되다가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이후, 조선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는데요.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 박람회가 열리며 이곳 일대의 조선 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 대부분이 철거되었습니다. 일제는 박람회 진행 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 있던 이곳 자리에 조선 총독관사를 지었고, 제7, 8, 9대 총독이 이곳을 관저로 사용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이곳에 관사를 지은 것은 조선 왕권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지음으로써 조선 왕실의 기를 누르고, 풍수지리학상 맥을 끊어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데 있었습니다. 한편, 광복 후에는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하지(Hodge, J. R.) 중장이 관저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 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후 경무대가 3·15 부정선거 등 독재와 비정(秕政)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자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부터는 ‘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이 등장하였는데요. 이는 대리석으로 된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데서 연유하였습니다.
이후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한편, 1990년 프레스센터인 춘추관과 대통령 관저가 신축되었으며, 구 청와대 건물, 즉 조선 총독 관저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1993년 11월 철거되는데요. 1989년, 집무실과 관사를 분리하며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으로 보존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철거가 진행되었죠. 그리고 1991년 9월 4일, 15만 장의 푸른 기와가 사용되며 본관이 신축되었습니다.
현재 대통령 관저가 용산 전 국방부 청사로 이동하며 2022년 5월 10일, 청와대는 국민에 개방되었는데요. 현재 관람객 수가 100만 명을 훌쩍 넘겼다고 합니다. 기사를 읽고 계신 여러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청와대를 둘러보며 우리 근현대사를 되새겨 보고, 경복궁 앞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도 함께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기획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 9기 양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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