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 식탁에서 피어난 이야기꽃
요즘 저녁 식탁 풍경은 제게 하루 중 가장 따뜻한 기적입니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와 함께 밥을 먹는 아이의 모습은, 이전의 바쁘고 늦은 귀가, 혹은 혼자 간단히 식사를 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일상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바쁘다'는 이유로 책상에만 앉아 있었기에, 가족과 식사 시간을 갖는 일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생긴 식사 시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대화들이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무슨 말을 해도 단답형으로 끝나던 아이가, 이제는 되레 제 말에 질문을 던지고, 실수담에는 장난을 던지는 여유까지 보입니다.
얼마 전, 샐러드를 너무 많이 담은 제 모습을 보고 제가 “사실 이거보다 더 담으려 했어. 너 잘 먹는 생각이 나서”라며 웃자, 아이는 “먹고 또 먹으면 되지”라며 웃어주었고, 저도 “그러니까, 나도 늙었나 봐”라며 따라 웃었습니다. 식탁 위의 그 웃음들이 어쩐지 마음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스며드는 느낌이었습니다.
변화, 그리고 놓친 마음
그날 저녁, 아이는 조심스럽게 요즘 스스로 느끼는 어려움을 털어놓았습니다.
“요즘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며, 자신이 예전보다 무언가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저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저 “아니야, 넌 여전히 똑똑해. 그냥 잡생각이 많아져서 그래”라고 말했지만, 돌아보면 그건 저의 시선이었지 아이의 감정을 충분히 읽은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공감’의 핵심을 ‘감정의 반영’이라 말합니다. 해결책을 급히 제시하기보다는, 먼저 상대의 감정을 읽어주는 것.
그 순간, “그래서 속상했겠구나”,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 스스로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라고 말해줬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늦게서야 밀려왔습니다.
뒤늦은 미안함, 그러나 진심인 후회
아이의 말은 자연스럽게 저를 과거로 데려갔습니다.
어릴 적 아이는 호기심이 풍부하고 스스로 배움을 즐기던 아이였습니다. 책을 읽고, 흥얼거리고, 학원에 가지 않아도 즐겁게 익혀가는 모습이 참 대견했고, 저 역시 학습지를 함께 보며 아이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시기에는 제가 손을 놓았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잘 놀아야 해", "운동이 더 중요해"라고 말하며, 본격적인 학습 환경을 미루었던 기억.
지금에 와서야 그때의 선택이 마음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회는 “이렇게 할 걸 그랬어”라는 정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 아이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밑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자녀는 왜 부모를 거부하는가』의 저자 조슈아 콜먼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한 열쇠로 ‘후회’와 ‘사과’를 언급합니다.
비록 늦었더라도, 진심이 담긴 반성과 공감은 관계의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 된다고 말이죠.
저는 오늘도 그 출발선 위에서 아이를 더 잘 이해하고, 더 많이 들어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를 알아가는 여정, '파고드는 성향'의 의미
아이와의 대화는 저를 저 자신에게도 이끌었습니다.
남들이 쉽게 넘기는 말이나 상황을 저는 늘 곱씹고, 파고들고, 이해하려 애써왔습니다.
그 성향이 때로는 ‘예민하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다’는 평가로 돌아오기도 했고, 저 자신조차 ‘왜 이렇게 둔한가’ 하며 오해했던 시간도 있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건 단점이 아니라, 저만의 성향이자 기질이었다는 것을요.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의 김수현 작가는 "나를 사랑하는 데 필요한 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라고 말합니다.
이제 저도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의미를 찾고 싶은 마음',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갈증'이 비로소 방향을 찾은 듯합니다. 그 길 위에서 저는 조금씩, 제 모습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세대를 잇는 이해의 순간
아이와의 식탁 시간은 제 기억을 더 먼 곳으로 데려갑니다.
어릴 적 저도, 엄마가 다른 형제 이야기를 할 때면 마음이 서운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데, 나에게 집중해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마음.
그 기억은 어느 날 문득 되살아났습니다.
아이와 저녁을 먹으려 밥상을 차리는데, 저도 모르게 다른 가족 걱정을 입 밖에 낼 뻔했습니다. 그때, 문득 어린 시절 제 마음이 떠올랐고, 저는 스스로를 다잡았습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이에게 집중하자.’
이건 가족상담 이론에서 말하는 ‘세대 간 전이’ 와 닿아 있는 개념입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방식이 무의식중에 자녀에게 반복되지 않도록 ‘알아차리고’, ‘멈추고’, ‘새롭게 선택하는 것’.
그날 저녁, 저는 아이에게 집중했고, 덕분에 우리는 더 편안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식탁에서 피어난 사랑, 그리고 온전한 지금
아이와의 식사는 단순한 한 끼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은 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었고, 저 자신의 본성을 이해하게 했으며, 엄마로서의 마음을 더 깊이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작은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놓친 감정을 돌아보며, 더 나은 대화를 꿈꾸는 그 노력 안에 부모의 진심이 담긴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아이와 함께한 따뜻한 식탁을 떠올리며, 저는 생각합니다.
사랑은 늘 거창하게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말 한마디와 눈빛 하나에서, 스며들듯 피어나는 것임을요.
여러분의 하루에도, 조용히 스며든 사랑이 있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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