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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영 Nov 17. 2022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어머니와 나, 궤도전차가 돌아서는 골목으로 산책을 나가요 우리는 마침내 표지가죽이 너덜거리는 고전을 내려놓고 오랫동안 걷기로 합니다 표지가죽의 냄새와 먼지, 곰팡이, 독서라는 이름의 환영에서 점차 멀어지기로 하며

 책만 아니면 괜찮아 책만 아니면 상관없어 철도길, 어둑해진 강둑이나 공동묘지도 좋아요 자작나무가 드리워진 흙길도 좋아요
 가을이면 철새가 되어 날아가는 생령이 보여요
 그가 유유히 빠져나가는 길목도 좋아요
 자작나무 드리워진 묘지도 좋아요

 어머니와 나, 우리는 생각의 면류관을 번갈아가며 쓰며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찢어내자고
 딱 허수아비만큼만 세상을 인식하자고 다짐합니다
 투명해지자고 꽉 거머쥐지 말자고
 그러나 사람의 가슴 안쪽에서는
 자꾸만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이 있지
 그 손길이야말로 불길

 산처럼 쌓아 올려둔 전언들은 모조리 불태우고 나왔습니다
 잿빛으로 물든 헛간을 등지고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이제 네 일기는 쥐가 달리기 좋은 트랙이야
 어머니는 내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사실 알고 있습니다, 다정하게 젖니를 흔들어주던 손길이
 때론 무덤가의 흙을 파헤치듯 집요해진다는 것을
 말들의 뼈를 함부로 뒤적인다는 것을

 고전서가를 배회하던 환영이
 어느덧 내 몸속을 걷고 있을 때
 직립의 세계, 그 속에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내 뒤에 업혀 갉아먹는 옛날이 있습니다

‌ 

 활자의 빛과 대등하게 겨룰 때

 일기는 유일하게 거닐 수 있는 산책로가 됩니다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테라야마 슈지.


공통점, 『마음 레코드의 기능상 요건』게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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