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휴가를 내어 집에 있다고 해서 사무실 근처에 새로 생긴 국수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국수 마니아인 나는 비빔국수가 땡긴다고 했더니 딸은 만두를 먹겠다고 했다.
비빔국수를 주문하고 만두를 시키려고 보니 만두가 들어간 메뉴는 안된다고 했다.
하필 그날 만두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두가 절실히 먹고 싶었던 딸은 대 실망을 했다. 딸은 할 수 없이 주꾸미 비빔밥을 시켰다.
그런데 셀프로 가져온 비빔밥의 주꾸미는 제대로 익지 않아 비린내가 나는 데다 양념도 되지 않은 채 통째로 들어가 있었다. 딸이 못 먹겠다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식욕이 확 달아났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달콤한 빵을 사서 입가심을 하며 한 끼 식사를 마무리 했다.
비록 우리가 기대한 식사를 하지는 못했지만 딸과 나는 평일에 출 퇴근 전후가 아니어도 만날 수가 있다.
딸이 사무실 가까이에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딸은 작년 이맘때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가까이에 있는 오피스텔을 구해 이사를 왔다.
평소에 독립하고 싶어하는 딸에게 "결혼하면 저절로 독립하는 건데 차라리 결혼을 빨리 하지 그래?" 라고 해봤지만 그 말은 아무런 울림 없이 지나갔다. 딸에게 독립해야만 하는 확고한 이유가 있는 것을 잘 알기에 구구절절 잔소리를 하는 대신 바쁜 딸을 대신해 두 팔을 걷어 부쳤다.
처음엔 딸도 그렇고 내 자신도 내 사무실 근처에 딸의 거처를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딸이 다니는 회사 근접 지역에 구하는 게 어느 모로 보나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전 월세의 거대한 벽에 막혀 버렸다. 좋은 수가 없을까,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는데 뜻밖에 사무실 근처가 좋은 대안이 되어 주었다. 뛰어봐야 벼룩 이라고 아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지만.
딸이 이사를 나간 후 텅빈 방을 생각만 해도 울적했는데 딸의 거처가 사무실 근처에 있게 된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 늦게 파 김치가 되어 퇴근하고 집으로 갔을 때
"엄마, 어서 와" 하며 웃는 딸의 모습을 보면 모든 피곤이 순식간에 사라졌었다.
사실 딸이 그냥 근처에 있다는 것 자체로 큰 위안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들러볼 수도 있다. 정확히는 미리 연락을 취해서 시간을 맞추어야 하지만.
내가 가고 싶다고 딸의 집을 다람쥐 풀방구리 드나들듯 드나들 수는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 내 집이 아니니까. 그러나 딸의 부탁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그런 마음이 되었을까? 답은 글쎄올시다, 이다.
딸은 이사를 나가기도 전에 내게 무시무시한 경고를 날렸다. 자기 집에 무턱대고 내 집 마냥 드나들지 말라고 했다. 자기의 사생활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나 뭐라나. 그러니 오고 싶으면 반드시 미리 연락을 하고 약속을 잡고 오라고 했다.
뭐지? 매사 좋좋소 하며 흐리멍덩한 내 속에서 나온 내 딸 맞나? 서운한 마음이 스쳤다. 그렇지만 솔직하고 똑 부러지게 의사 표현을 해 주는 게 뭐가 나쁜가? 잠시는 서운할지 모르겠으나 제때 딱 잘라 주어야 훨씬 오래오래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딸은 인생을 일(work)생으로 살고 있다. 주제가가 바쁘다 바빠 이다.
딸도 바쁘고 나 또한 비슷한 처지라 딸네 집에 가도 머무는 시간은 고작 10분 내외라고나 할까? 선 채로 일을 보고 나오기 일쑤다. 빨래 거리를 담아 온다던가 같이 분리수거를 할 뿐이다. 출근길에 들르는 날은 빨래를 갖다 놓거나 우유나 약간의 과일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나오면 그걸로 끝이다.
처음에 딸이 좋아하는 밥과 반찬을 해다 놓기도 했으나 며칠 후에 내 손으로 다시 갖고 와서 버린 후에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게 되었다. 딸이 내가 해 준 음식을 먹을 시간도 없을 뿐더러 먹지 않은 음식을 보면서 죄책감만 쌓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저렇게 바깥 음식만 주구장창 먹으면 건강이 어찌 될까 하는 걱정도 내려 놓았다.
딸은 항상 골고루 잘 먹고 있으니 엄마나 잘 먹고 다니라고 한다. 알았어, 나나 잘 할게.
나는 딸이 일러준 규칙을 잘 지키고 있다.
"퇴근하고 너거 집에 들러도 돼?" "아니 오늘 너무 바빠."
"엄마 오늘 올래?" "아니 추워서 일찍 집 가서 쉬고 싶어."
"오늘 갈까?" "아니 오늘 야근이야, 아직 퇴근 안 했어."
그래도
퇴근 시간에 종종 사무실 앞까지 찾아오는 딸과 함께 산책을 하기도 한다.
"비가 왔는데 꽃이 안 떨어졌어."
"꽃이 막 피려던 참이라 그래. 힘이 남아 있어서 안 떨어진 거임."
"곧 면담이 있어. 면담은 처음인데, 뭐라고 하지?"
딸은 회사에서 하는 면담의 특징과 면담에서 하면 안되는 이야기, 면담에서 가장 흔하게 하는 말 등을 일러주었다.
딸은 지금 나고야에 있다. 지브리 파크를 여행하는 중이다.
나고야에 가기 전날 나는 딸에게 "아무 걱정 말고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놔,
내가 싹 치워 놓을게." 했다.
딸이 없는 첫날에는 방 청소와 정리 정돈 화장실 청소를 하고 침대 시트를 걷어왔다.
둘째 날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들러서 침대 시트를 씌워 놓고 씽크대를 말끔하게 한 뒤 분리수거를 했다. 딸이 집으로 갔을 때 편하게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딸이 사무실 옆에 살고 있어서 가끔이지만 몸으로 하는 엄마 역할도 할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