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직장 생활을 호빵이라 치면 사무실 지척에 있는 도서관은 호빵의 앙꼬 같은 곳입니다. 호빵에 앙꼬가 없다면 호빵 맛은 얼마나 심심할까요? 도서관이 없다면 저의 직장 생활 또한 못 말리게 지루할 것입니다.
도서관은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부가 무척 깔끔하고 고급스럽습니다.
특히 신간 코너와 사서 선생님들의 자필 리뷰 액자로 꾸며져 있는 이달의 책 코너, 큰 글자 책 서가는 까페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돋보이는 것은 이용객들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한 자리 배치와 의자입니다. 임산부 의자가 따로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장소마다 조금씩 다른 의자와 테이블을 구비해서 편하게 이용할 수가 있지요.
저는 보통 12시에 사무실에 출근합니다. 도서관은 그전에 들러는 필수 코스입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침부터 집안일로 종종 걸음 치느라 가빴던 숨을 고르지요.
오늘 아침에도 밥을 안쳐 놓고 순두부 계란찜에다 도시락 반찬으로 마늘쫑 새우 볶음을 만들었습니다. 중간중간 설거지를 하고 대 걸레에 부직포를 끼워서 청소도 했지요. 아침 식사는 전날 김치찌개에 말아서 대충 먹고 도시락을 준비해서 집을 나섰습니다.
남편이 "오늘은 왜 이리 일찍 나가노?" 했습니다.
"원래 이 시간에 나갔는데요, 이따가 계란찜하고 밥 드세요. 반찬도 이것저것 냉장고에 있으니까 먹을 만큼 들어서 잡수시오."라고 한 후
"수고하시오." 하는 남편의 말을 뒤로 하고 냅다 집을 나왔습니다.
도서관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평화로워서 집에서 종종 걸음 치며 움직이던 방금 전의 일들이 꿈처럼 아득할 정도입니다.
도서관에서 새로운 나만의 고요한 세상이 열리는 것을 느낍니다.
장시간 앉아서 집중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지정석에 앉습니다. 키오스크에 회원 바코드를 인식 시키면 좌석 번호를 부여 받을 수 있지요. 잡지나 신문을 가볍게 읽을 때는 신문 정리대 앞에 비치 되어 있는 좌석을 이용합니다. 다양한 좌석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는 뭐니뭐니 해도 큰 글자 책 서가 바로 앞에 있는 쿠션이 푹신한 의자입니다.
큰 글자 책 서가에는 요즘 핫한 책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책부터 큰 글자로 만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면 대여를 합니다. 갈 때마다 같은 책을 찾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다음에 왔을 때 누가 대여해 가고 없으면 이어 읽기가 어려우니까요.
박완서선생님책을 포함해서 김승옥, 장강명, 요조, 무리카미 하루키, 루쉰, 모옌, 다나베 셰이코, 같은 작가의 책을 대여했습니다. 옛날 책, 요즘 책, 무거운 내용, 가벼운 내용 할 것 없이 맘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빌렸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책은 영화 감상문를 연재하면서 찾아 읽은 원작입니다.
그녀의 책처럼 영화 리뷰를 연재하며 원작을 찾아 읽는 재미에 한동안 영화 원작을 많이 빌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책을 무척 대단히 억세게 많이 읽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많은 책 중에 끝까지 읽은 책은 몇 권 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인지, 시간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책이 재미없어서 인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에는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골라 읽는 것 만큼이나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역시 글쓰기 입니다. 브런치 글쓰기를 시작한 곳도 이곳 도서관이었습니다.
시작은 좋았지만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제 입에서 셀프 검열의 결론으로 나온 말이 있습니다. '글쓰기를 위한 공부가 필요해'
도서관에 오기 시작한 시점에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읽은 책은 글쓰기 강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조지오웰, 안정효, 유시민, 강원국, 정여울, '이시카와 유키'의 쓰는 습관 글쓰기가 어려운 너에게, '다나카 히로노부'의 글 잘 쓰는 법, 등 이 세상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얼마나 많던지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비록 지금 머리에 남아 있는 건 없지만요.
기억에 남아있는 한 구절이 있긴 합니다.어떤 책(책 제목, 저자 모름)에 이런 대목이 있었습니다. '쓰면 써진다.' 글쓰기 정말 하기 싫을 때 이 말을 떠올리며 뭐라도 쓰다 보면 정말 써지는 게 있더라구요.
제가 이미 알고 있던 '글쓰기는 오직 글쓰기로만 훈련된다.' 와 함께 금쪽 같은 명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는 오직 글쓰기로만 훈련된다.' 이 말은 제가 아이들과 독후 활동을 할 때 글쓰기 비법을 묻는 학부모들한테 종종 하던 얘기입니다. 물론 이 구절의 출처도 오리무중입니다.
보다 나은 글쓰기를 위해 읽었던 책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글쓰기에 도움을 받으려면 '글 잘 쓰는 법에 관한 책'을 읽는 것보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더 낫다 라는 교훈이라도 챙겼으니까요.
요리에 취미가 있는 사람들은 요리 유튜브를 보면 요리가 하고 싶어진다고 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으면 저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요. 글쓰기에 게으름이 날 때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예열이 되고 글쓰기 스피릿이 장착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곳 도서관에서 출근 전에 브런치에 올릴 글의 초고를 쓰는 편입니다.
저녁 10시 퇴근이어서 시간적 제약이 많고 절대 시간이 부족한 형편이라 이곳에서 대충이라도 얼기설기 가닥을 잡아 놓습니다. 그리고나서 사무실에서 짬 날 때마다 조금씩 고쳐가며 마무리를 하는 것이지요.
좀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도서관을 전혀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도 합니다. 낮잠을 자는 것이죠. 가끔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잠을 청하고 눈을 붙일 때도 있습니다. 주룩주룩 굵은 빗방울이 사정 없이 퍼붓거나 폭설이 와서 도저히 산책이 불가능할 때 그렇게 합니다. 사무실에는 직원 휴식 공간이 아예 없거든요. 하지만 그럴 때를 제외하고는 대개는 책을 읽다가 깜빡 조는 수준입니다.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난 날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눈이 감깁니다. 그럴 때는 굳이 잠을 쫒아 내지 않는답니다. 십 여분 정도라도 눈을 붙이면 정말 개운하거든요.
몰지각해 보이나요? 죄송합니다. 근데 저만 그런 게 아닙니다. 심지어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대놓고 자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광경을 심심잖게 볼 수 있는 이유를 도서관 좌석 탓이라고 어거지를 대 봅니다. 좌석이 잠을 부른다고나 할까요? 의자라고 하기엔 너무 푹신하고 편안합니다. 가정집 1인용 소파에 가깝지요.
얼마 전에 저의 핫 플레이스 도서관 출입에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제가 일하는 센터 회원의 등장 때문입니다.
건강 강좌 회원인 어르신을 도서관에서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저를 보자마자 제 옆에 와서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었습니다. 수필을 읽고 있다고 대답 했더니 대뜸 무슨 수필 나부랭이냐며 비웃더군요.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침해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그 후에도 거의 매일 같이 제 옆에 와서 저를 불편하게 했지요. 저는 그만한 일로 타격을 받는 소심한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분 때문에 한 달 이상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도서관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시 갈 수 밖에 없었지요. 오랜만이라고 하며 왜 그동안 안 왔냐고 묻는 그 분에게 집중에 방해가 되니 도서관에서는 말을 거는 것을 삼가해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도서관은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한 직장 생활에 활력을 줍니다. 제가 찾던 책을 만나면 집안 일로 쌓인 피곤이 싹 가실 정도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리고 책을 읽을 수록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쌓이는 것도 즐거운 일입니다. 다음에 읽을 책에 대한 기대로 절로 신바람이 나니까요. 빌린 책을 다 읽지 않고 반납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읽은 만큼은 재미와 감동을 받지요. 이래저래 사무실 옆 도서관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