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박 Oct 18. 2021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무 말 말고 전화받아

무인점포를 운영하다 보면 전화번호 기재는 필수다. 손님들은 주인의 얼굴을 거의 볼 수 없기 때문에 벽에 붙은 전화번호를 통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가게에 게시판이 있어서 활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즉각적인 문의를 위해 전화를 많이 이용한다.


이전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슬쩍 안 받기도 했는데 무인점포를 운영하면서 모르는 전화도 무조건 받는다. 처음에 가게를 시작할 때는 너무 밤에 전화가 올까 봐, 행여 장난 전화가 올까 봐 걱정했다. 그렇지만 여태 그런 전화는 한 통도 걸려오지 않았다. 하여튼 지레 겁먹기는.


개업 초기 가장 많이 온 전화는 '미등록 상품이 있어요'였다. 작은 가게지만 의외로 많은 물건이 있다. 개업을 위해 업체에서 와서 상품 등록을 해주고 갔다. 그런데도 빠진 게 많은지 전화가 잦았다. 한날은 아예 결심하고 모든 상품을 찍어보았다. 다 등록이 돼 있어서 안심하고 돌아갔는데 또 전화가 왔다. 같은 상품이라도 색깔이 다르면 바코드가 달라서 두 번 찍어야 했다. 상품의 가격을 다 외우지 못해서 전화 건 손님에게 '그래서 그게 얼마냐'라고 되묻기도 했다. 손님이 주인에게 가격을 알려주는 꼴이었다. 그럴 때면 같은 가격의 다른 상품을 대신 찍거나 계좌로 입금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부분 흔쾌히 도와주었다. 하지만 안 찍혀서 구매를 포기하고 갔다는 말을 나중에 전해 듣기도 했을 땐 속상했다. 신상 물품이 오고 난 후에도 미등록 상품이 가끔 있었다. 새로운 상품은 호기심을 자극해 금방 한 두 개는 빠지기 마련인데 그대로일 경우엔 의심을 해봐야 한다. 일주일이 지나도 한 개도 안 팔린 물건은 일부러 등록 여부를 체크했다.


한번에 온 과자 택배! 다 혼자 정리해야 한다.


두 번째로 많이 걸려온 전화는 '바코드가 없어요'였다. 상품 중에는 바코드 없이 출시되는 것들도 있다. 포장재가 울퉁불퉁하거나 초소형 상품이 그랬다. 그래서 포스기 하단에 버튼을 만든 후, 터치해서 계산이 가능하게 만들어 두었다. 메모도 큼지막하게 해 두었다. 그래도 전화가 왔다. 지금은 전화가 거의 안 오는 걸 보니 손님들도 다 적응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바코드가 없으면 그냥 가져가기도 했다. 하루는 48개짜리 젤리의 매출을 조사해보니 40개만 팔리고 8개는 증발해 버린 것을 알게 됐다. 소리 내서 '흐엉-' 해 보았지만 떠난 임은 돌아오질 않는다. 그냥 큼지막하게 '바코드 없는 물건도 계산하셔야 해요. 그냥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라고 써놓았다.


인상 깊은 연락은 '도둑 있어요'와 '레인보우'다. 다른 에피소드에도 썼지만 '나중에 낼게요' 메모를 붙이고 도망가버린 초등 저학년을 잡는데 일등 공신 고학년 여학생이 '도둑 있어요'의 주인공이다.


가게에 있을 때 답례를 하고 싶어서 하교 시간 맞춰 제보 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럴 땐 딸아이가 같은 학년인 게 도움이 된다. 학교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 가게에 지금 들러줄 수 있냐, 선물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학원에 가야 해서 곤란하다고 했다. 그럼 아무 때나 한번 들러서 전화 한 통 달라고 했다. 청소를 모두 마치고 돌아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누구랑 같이 왔냐니까 친구랑 왔단다. 친구랑 같이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으라고 했다. '아, 괜찮아요'라고 했지만 나는 설득했다.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다. 학생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궁금해서 녹화된 화면을 돌려보니 고작 800원짜리였다. 정직하고 착한 아이들은 도처에 있다. 고마운 마음에 괜히 코끝이 찡했다.


'레인보우' 구슬 아이스크림의 종류다. 문자를 받고 몇 분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났다.


"저희 아이가 아토피가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구슬 아이스크림 중에 레인보우 맛을 갖다 놔 주실 수 있나요?"


내 딸 보미도 대여섯 살 때 겨울만 되면 대퇴부 뒤쪽을 마구 긁었다. 부분적인 아토피였다. 극건성이기도 했다. 그때 한창 유행하는 크림이 있었는데 좀 고가였고 소아과에서만 팔았다. 아끼지 않고 듬뿍듬뿍 발라주고 재웠지만 효과는 그때뿐이었다. 어려서 스테로이드가 들어있는 연고를 발라줄 수도 없고 벅벅 긁어대는 아이에게 절대 긁으면 안 된다고 으름장 놓는 것 이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과자를 좋아해서 먹이면 그날은 피가 나게 긁기도 했다. 그때 생각이 나서 '레인보우 아빠'의 문자를 몇 분 동안 물끄러미 바라봤었다.


바로 아이스크림 담당 기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스크림은 여름엔 일주일에 두 번씩 온다. 그날은 왔다간 날이어서 며칠이 지나야 오게 될 것이다. 사정을 들은 기사님은 다음날 바로 갖다 주었고, 나도 출근해서 바로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무인 편의점입니다. 레인보우 아이스크림 왔으니 언제든 방문해 주세요."


어느 ,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남성이 구슬 아이스크림 냉동고로 곧장 걸어가 레인보우만 여덟 개를 집는 것을 보았다. 반가운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니, 사장님이냐고 물었다. 아이가  가게에서 먹을  있는 것은  아이스크림뿐이라고, 애가 좋아하기도 하고 우유가 들지 않아서  맛만 먹을  있다고 거듭 설명했다.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하는데  앞에 가게가 생겨서 너무 좋다고 하였다. 나도 좋았다. 연락 주시면 언제든지 가져다 놓겠다고 씩씩하게 말하였다. 나도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작은 데서도 감동을 받는다. 무인 점주도 손님과 소통하며 성장하는 모양이다.



경찰에게도 전화를 받았다. 우리 가게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데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가게 앞에 설치한 폐쇄회로 카메라는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차는 물론, 사람까지 선명하게 찍힌다. 양쪽에 달려 있어서 좌우를 모두 살펴볼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CCTV 화면을 보여줄  있느냐고 전화가  것이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간 대를 특정해서 말해주면 돌려보기가 좋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3주라는 시간이 지나서 도움이 돼주지 못했다.


경찰서에서  번째로 걸려온 전화는 이름까지 밝힌  경위님이었다. 다른 곳에서 남의 카드를 주운 누군가가 그것을 자기 카드처럼 쓰고 다닌 정황이 포착됐다. 우리 가게에서는 심지어  건이나 긁었다.  번은 - 아마 실험해보려고  - 800원을 긁었고, 카드 사용을 성공하자, 8100원을 다시 긁었다.  간도 컸다. 그런데 8대의 CCTV  어디에도 주인공의 얼굴을 찍은 카메라가 없었다. 이유는 엄청나게  모자를 쓰고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멕시코 산초 복장 같은  모자를 쓰고 있으니 증거가 확실한데도 얼굴을 특정하지 못하였다.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정직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또 한 번은 가게 앞 인도에 설치된 볼라드(인도로 차량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는 안전 설치물)가 파손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관리사무소에서 CCTV를 보여줄 수 있냐고 물어서 돌려보았다. 새벽 5시, 옆 편의점 트럭이 물건 하차를 위해 후진해서 인도로 진입하면서 볼라드를 땅에서 무 뽑듯 뽑아내고 진입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혔다. 그 볼라드는 아파트 소관인 모양이었다.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큰일에 협조한 기분이어서 괜히 뿌듯했다.


그리고 어제 재밌는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라나라고 하는데요. 혹시 이 가게에서 촬영을 좀 해도 될까요? 어디에다가 올릴 건 아니고요, 학교에서 과제로 써야 하는데 괜찮을까요?"


내가 안된다고 말할까 봐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초등학생의 전화였다. 흔쾌히 허락하고 CCTV를 돌려보니 내 전화를 끊자마자 좋아서 발을 두 번 구르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 미소가 폭발했다. 화면에는 보이는 네 명의 여학생들은 삼각대를 설치하고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다. 귀엽고 좋았다. 무인점포는 재밌는 곳이다!




무인점포를 운영하다 보니 내 가게가 나 없는 사이에 잘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크긴 하지만 나 없는 동안 누군가에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도 바라게 됐다. 날이 더운 날에는 에어컨 빵빵한 가게에 들어와서 잠시의 피서를 즐기고, 날이 추우면 잠깐의 훈기라도 몸에 얹고 가면 좋겠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은 가게 어닝 아래에서 비를 좀 피해가도 좋고! 실제로 우리 가게에는 오후 서너 시부터 학원 차를 기다리는 초등학생들이 자주 온다. 청소를 하다 보면 내내 마주치는 친구들도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도 되고, 재미도 주면서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은 어떤 전화가 올까? 궁금해, 궁금해!


출처 픽사베이




이전 08화 무인 편의점 강도 사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