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습득하고 배우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사랑을 습득하고 배우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한동안 철학에 관심을 가졌을 때 읽었던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은 얇은 두께와 달리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었다. 책장 구석에 놓아둔 책을 다시 꺼내본다. 프롬은 사랑에 관한 흔한 정의를 부수면서 사랑을 재정의 한다.
“만일 내가 참으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을 하면 두 존재가 하나가 되지만 그럼에도 그대로 둘인 모순이 발생한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며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한 일이 네게 사랑이 아니었고 네가 사랑으로 한 일은 나에게 사랑이 아니었다는 오해와 불통은 사랑에 대한 정의가 제각각이라서 발생한다. 프롬에게 사랑의 능력은 삶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기애에서 출발한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를 실천하려면 먼저 내 몸을 사랑해야 하니까.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전도력이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라
“어머니의 사랑이 있으면 사랑받는 사람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프롬의 사랑의 원천은 어머니의 대한 사랑이었을까. 자기애를 지닌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사랑, 기쁨, 행복이 무엇인지 삶 자체로 가르쳐준다. 난 부성애보다 모성애가 낫다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 보다도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의 정도가 자녀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공감한다. 사랑의 받은 사람이야말로 베풀 수 있다. 나에게도 부모님의 영향력은 크다. 문득 '사랑하다'라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랑은 상태가 아니라 활동이며, 사랑하는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려는 태도가 문제이다. 사랑은 수동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주는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