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꽃집은 걸어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그래서 여느 때라면 꽃 사러 간다는 핑계로 적당히 산책 겸 걷기 좋은 거리다. 그러나 겨울에는 좀 얘기가 복잡해지는데 그 10분의 거리 동안 찬바람에 노출된 꽃이 그새 얼어버리거나 하는 게 아닌지 하는 걱정에 안절부절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눈 같은 게 온 날은 가뜩이나 좋은 운동신경에 꽃까지 손에 들고 군데군데 얼어있는 길을 걸어갔다 걸어온다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고.
그래서 한참 맹추위가 기승을 떨치던 지난 몇 주간 나는 소셜 커머스에서 화훼 농가 돕기를 한다는 상품으로 내놓은 배달꽃을 주로 이용했다.
산지 직송이라 그런가 꽃들은 이 맹추위를 뚫고 온 녀석들답지 않게 싱싱했고, 그래서 오래갔다. 몇 번이나 언급한 그 겹백합만 해도 2주를 쌩쌩하게 버티고 얼마 전에야 제 수명을 다했다. 이 녀석은 질 때 또 어떻게 질까를 고민했지만 겹백합의 마지막은 이름이 비슷한 백합보다는 오히려 작약에 가까워서 색이 바랜 꽃잎들이 조용히 말라 떨어지는 정도에서 그쳤다.
그리고 그 후임으로, 우리 집에는 이틀쯤 전부터 튤립 열 송이가 그의 책상을 지키고 있다.
처음 왔을 때의 튤립은 꽃이 아니라 무슨 채소처럼 보였다. 길고 시퍼런 이파리와 꼭 닫혀 아직 색조차 나지 않은 봉오리들만 잔뜩 있어서 더 그래 보였다. 어찌 됐든 만 하루를 종이 상자 안에서 이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온 녀석들이 목이 마를까 싶어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줄기를 다듬어 꽃병에 꽂았다. 그래놓고도 혹시나 얼지는 않았는지, 물은 잘 마시고 있는지가 걱정돼 몇 번이나 그 앞을 오가며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이 튤립이 자꾸만 드러눕기 시작하더니 잠자리에 들기 전 무렵에는 죄다 거꾸로 선 U자 모양으로 휘어졌다. 나는 겁이 더럭 났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나는 부랴부랴 판매자님에게 튤립이 자꾸 눕는데 이거 어떡하면 되냐는 문의글을 올렸다. 튤립을 두어 번 사다 꽂아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드러눕는 녀석들은 처음이어서 더 그랬다.
그러나 걱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날 자고 일어나 보니 녀석들은 어젯밤 한참 드러누웠을 때에 비래 반쯤은 일어난 모습을 하고 있었고 그날 오후쯤에는 제법 꼿꼿하게 다시 일어섰다. 시퍼렇던 봉오리에도 조금씩 색이 돌기 시작해, 이재는 제법 주황빛의 재 색을 찾기 시작했다. 뒤늦게 확인해 본 판매자님의 답글로는, 튤립은 원래 눕혀놓은 상태에서는 드러눕는 습성이 있으니 꽃병에 꽂아서 하루 정도 지켜보시면 다시 일어날 거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잘라서 물에 꽂았는데도 이렇게 눕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신기하게도.
이제 올해가 오늘까지 다 합쳐도 고작 사흘이 남았다. 새해엔 나도, 더러더러 드러눕더라도 알아서 일어서는 기특한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내가 언제 드러누웠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튤립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