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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Mar 18. 2024

장미 being 장미

-112

오래전에 잠깐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을 애청하던 시기가 있었다. 정확한 연도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박찬호 선수가 한참 메이저리그에서 뛸 무렵이 아니었던가도 싶다.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에는 내 눈에는 저 사람이 도대체 야구를 잘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조차도 잘 분간이 되지 않는 굉장한 4차원 선수가 있었다. 매니 라미레즈라는 이름을 가진 그 선수의 뒤에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문구가 하나 있다. Manny being Manny. 한국어로 정확히 번역이 되기 힘든 말이다. 억지로 번역하자면 '매니는 매니다' 혹은 '그러니까 매니다' 정도가 되겠다. 혹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매니가 매니 했다' 정도로 번역하면 맞을까.


장미를 사다 놓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 겨울을 지나는 동안 자의 반 타의 반 그의 책상에 놓은 꽃들은 내가 고른 꽃들이 아니라 소셜 커머스에서 그렇게 파는 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겹백합과 튤립과 백합과 소국과 알스트로메리아가 번갈아 자리를 지키는 동안 장미는 그의 책상에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래서 3월 초에 오픈한 상품이 장미라는 걸 알았을 때 간만이라는 느낌에 반가웠다. 그리고 지난 화이트데이, 봉안당에 갔다 돌아와 떡볶이 양념이 묻은 니트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 장미가 집으로 베송 돼 왔다.


이번에 산 장미는 색상이 랜덤이라고 하더니 정말로 랜덤하다. 빨간 것이 세 송이, 노란 것이 두 송이, 분홍색이 두 송이, 그리고 크림색부터 아이보리색을 거쳐 온갖 종류의 조금씩 다른 흰색이 다섯 송이다. 하나같이 송이들이 크고 실해서 안개꽃 같은 것이나 조금 덧대고 포장만 좀 풍성하게 하면 5, 6만 원어치 꽃다발 정도는 우습게 나오겠다는 생각을 한다.


장미는 누가 뭐래도 흔한 꽃이고 그래서 가끔은 식상하다. 가끔 꽃집에 꽃을 사러 가면 타이밍이 좋지 않아 쇼케이스 속의 꽃들이 다 빠지고 없을 때가 있는데, 아무리 구색이 없어도 장미 한 두 색깔 정도는 반드시 있을 정도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장미는 언제나 그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다. 심지어는 '도저히 다른 살 만한 꽃이 없을 때' 사는 마지막 순번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그의 책상 위에 버티고 선 그 자태는 또 역시나 이런 꽃을 놔두고 일부러 다른 꽃을 살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당당하고 화려하다.  열두 송이나 되는 장미 중에 온전히 색깔과 모양이 같은 것이 한 송이도 없는데도, 그래서 자칫 조잡하고 산만해 보일 수 있는데도 이 없는 솜씨에 꽂아놓은 모양이 또 제법 그럴듯해 보여서 역시 꽃 중의 꽃이고 꽃의 여왕이다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래서 꽃을 사고, 이래서 장미를 산다. Manny being Manny라는 말만큼이나 장미 being 장미 쯤 되겠다. 장미는 장미다. 그러니까 장미다. 혹은, 장미가 장미 했다. 뭐 그런 뜻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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