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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20. 2023

겹백합의 폼이 미치면

-23

뜻하지 않게 짧은 투병 생활을 거치면서, 가뜩이나 썰렁했던 내 일상은 거기서 본의 아니게 또 약간 더 정리가 되어버렸다. 나름 해야 될 일만을 하고 안 해도 되는 일은 안 하면서 산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병원에서 나온 후 내 생활은 조금 더 단출해졌다.


그의 책상에 꽃을 꽂아두는 세리머니도 이젠 하지 말까 하던 생각을 사실은 했었다. 그것은 귀찮아서라거나 돈이 들어서의 문제는 아니었고, 자꾸 그런 식으로 붙잡으면 떠난 사람이 좋은 데 못 간다는 병원에서 들은 몇 가지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이제 이 짐스러운 세상 벗고 좋은 데로 떠난 사람이니 거기서 편히 쉬게 해 줘야지 자꾸 불러내면 쉬지 못한다는 그 말은 또 꽤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했다. 나이도 젊은 사람이 언제까지 떠난 사람 물건 껴안고, 그 사람한테 꽃 사다 바치면서 그렇게 살 거냐는 말을 듣고 나는 이제부터는 꽃도 사지 않고, 그의 물건들도 정리하고 해야겠다는 나름의 결심을 했었다. 한 달쯤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사는 일이 뭐든 다 그렇지만 직접 맞닥뜨려보면 그게 또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당장 꽃을 사다 놓는 문제만 해도 그랬다. 실제로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 일주일 정도 꽃을 사놓지 않았다. 병원에서의 결심도 결심이거니와, 뜻하지 않은 일로 꽃병에 꽂힌 채 말라죽어버린 장미의 모습이 내겐 제법 충격이었기에 더 그랬다. 아무리 이미 꺾여서 한 번 죽은 목숨이라지만 그걸 그런 식으로 두 번 세 번 죽인 나에게 과연 다시 꽃을 살 자격이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그래서, 꽃 같은 건 지난 1년간 실컷 봤으니 이젠 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일주일 간 깨달은 것은, 그의 책상에 둔다는 핑계로 사 온 그 꽃들에게서 정작 더 큰 위안을 얻고 있었던 건 그가 아닌 나였다는 사실이었다. 대화가 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움직이지조차 못하는 꽃병에 꽂힌 그깟 꽁 한 다발이 사라져 버린 자리는 생각보다 크고 휑했고, 그래서 나는 그 허전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다시 꽃을 사다가 그의 책상에 꽂아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 꽃병에 물을 갈아주며 다짐한다. 다시는 내가 책임지기로 마음먹은 것들을 본의 아니게 유기하지 않도록, 내가 나를 잘 챙겨야겠다고.


그리고 예의 그  겹백합은, 그렇게 다시 꽃을 시고 난 후 세 번째로 산 꽃이다.


며칠 전에도 꽃이 피기 시작하니 너무나 화사하고 얘쁘다는 글을 한 번 썼었다. 그러나 어제부터는 정말 역대급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무서운 기세로 꽃이 피고 있어서 오늘 아침엔 겨우 이 정도 돈을 주고 이렇게 호사스러운 눈호강을 해도 되는가 싶어 한참 동안 꽂아놓은 꽃들을 이렇게도 돌려보고 저렇게도 돌려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기껏 얼마 전까지 어렵게 먹은, 편히 쉬게 자꾸 불러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머쓱해지지만 애써 그렇게 생각해 본다. 내 눈에 이렇게 예쁘니까 당신의 눈에도 그럴 거라고. 우리는 늘 둘이 합쳐 1인분이라, 내가 좋은 것은 당신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오늘 아침은 좀 '영'하게, 그렇게 한 마디 중얼거려 본다. 이야. 겹백합 폼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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