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베라를 수명이 짧은 꽃쯤으로 생각했던 것이 대단한 실례였다는 것을 이쯤에서는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산지에서 바로 받은 거베라는 더러 줄기가 무르고 속 부분이 짙은 갈색으로 변하기도 하면서도 그래도 꽤 꿋꿋하게 잘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그러나 꽃이란 이런 식으로 버티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훅 시들어 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주문해 놓은 프리지아가 과연 언제나 올 것인가 하고,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판매자 분에게 문의를 넣어 놓았지만 월요일이 다 가도록 답은 없었다. 모르긴 해도 주말에 밀려든 주문 건을 처리하느라 바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긴 해도 거베라가 이번 주 정도까지는 버텨줄 것 같으니 이번 주 안에만 배송이 오면 되겠는데. 하긴 이제 겨울이 끝났다는 점이 가장 크겠다. 작년 겨울 한참 추울 때 급작스런 한파에 물려 주문한 꽃을 거짓말 좀 보태 한 달 정도 후에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변수는 많이 줄어들었을 테니 그래도 설마 4월 8일 지나서 꽃이 오는 불상사는 없겠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리고 어제 오후, 나는 무슨 뜻하지 않은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소리소문 없이 배송돼 온 프리지아 한 상자를 받았다.
역시나 자그마치 30대를 꽃병 하나에 억지로 쑤셔 박듯 꽂는 것은 꽃에게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꽃병 두 가애 나누어 꽂았다. 백합 같은 '갑바'가 있는 꽃이라면 꽃병이 최소한 세 개는 필요했을 테지만 프리지아는 워낙 키가 크고 날씬한 꽃이어서 세 개까지는 필요하지 않았다. 열 송이씩 묵여있는 테이프를 자르고 한단 반씩을 나누어 꽂았다. 겨울에 받은 꽃들은 바깥의 추위에 시퍼렇게 질려 있었는데 날이 좀 따뜻해진 탓인지 상자에서 막 꺼낸 꽃은 이미 제법 조금씩 피고 있는 중이었다. 허둥지둥 꽃병에 물을 받아 한송이 한송이 줄기를 손질해 꽂았다. 그렇게 꽂은 프리지어 두 병은, 하나는 늘 두던 그의 책상에 두고 하나는 거실에 두었다. 거실은 내가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아니어서 여기에 두기는 좀 아까웠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만간 내 책상으로 옮겨온 거베라들이 은퇴하면 그때는 내 책상으로 가져다 둘 생각이다.
프리지아 향기가 좋다는 생각을 딱히 해 본 적은 없는데 어제 온 프리지아는 싱싱해서 그런가, 향기가 꽤 짙게 났다. 이거야말로 예전에 유행하던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아 꽃 향기를 내게 안겨 줄' 그런 연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던 어느 노래의 가사에 나오는 그 프리지아 향기로구나 하는 생각에 한참이나 그 향을 맡고 있었다. 한나절 남짓을 꽂아 두었는데도 새로 올라온 꽃봉오리들이 하나씩 벌어져서 제법 샛노란 색깔이 집안 여기저기에 가득하다.
2년 전 내가 뭔가에 홀린 듯 사 왔던 그 프리지아는 저만큼 싱싱하고 예쁘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새삼 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당신이 나를 떠나간 계절이구나.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미련스레 살아보겠다고 이렇게 발버둥을 치면서 살고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한다. 노란 프리지아를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