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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30. 2021

2명의 차영미

( 에스파듀 )

고통스러운 숙제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선생님은 위인전을 한 권을 읽고 독후 감상문을 써 오라고 했다. 열 살의 나는, 책을 접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 둘 다 일을 하셔서 바빴기에 학원을 보내셨을 뿐, 책을 권하지 않으셨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다.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도 없었고, 집에는 몇 권의 요리책과 가계부뿐이었다.

신문기사 하나를 읽는 것도 버거운 나에게 일주일에 위인전 한 권 읽기는 해낼 수 없는 숙제였다. 물론 좋은 의미의 숙제였지만 가혹했다. 책을 읽지 않는 모범생이었던 시절, 해야겠는데 할 수 없던 숙제는 고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위인들을 짧게 요약해 놓은 한 권의 책을 들고 와 보여주었다.     


“나 숙제할 때 여기 있는 거 보고 써서 내.”      


그런 방법이 있다니…. 산신령이 나타나 금도끼를 준 것만 같았다. 보여준 것 역시 책이었기에, 그런 책이 있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몇 주간 힘겹던 고민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 서점에 가서 친구가 보여준 책을 샀다. 그리고 한주에 하나씩 옮겨 적어 가까스로 숙제를 했다. 


세종대왕, 신사임당, 이순신, 장영실 등등.... 


손안에 있던 위인전 사전은 지금의 인터넷 속 지식인 같은 역할을 했다. 선생님이 내준 숙제를 요약본으로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게 최선이었다. 못해서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몇 주 동안 쪼글쪼글한 마음으로 숙제를 냈다. 걸릴까 봐 조바심이 났지만, 선생님은 별말씀이 없으셨다. 그래서 10살의 나는 베껴 쓴 독후감이 걸리지 않는구나 안도했다.    

 

어느 날, 숙제를 깜박하고 하지 않은 날이었다. 그대로 안 하고 냈어야 했는데, 급하게 친구의 숙제를 베껴 써서 냈다. 위인전을 옮겨 쓰는 일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양심에 브레이크가 사라졌다. 2교시가 끝나고 선생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두 권의 공책을 들며


“왜 차영미가 두 명이야?” 


하셨다. 장미처럼 온몸에 가시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아침에 독후감을 베끼면서 내 이름으로 바꿔 써야 하는데 그 친구의 이름까지 베낀 것이었다. 공개적으로 거짓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친구에게도 미안했지만 가장 죄송했던 건 믿어주신 선생님이었다. 불려 나가 사실대로 고백했다. 크게 꾸지람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 이후 수업시간마다 선생님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죄송하고 또 죄송했다.


눈동자는 애꿎은 책상에, 벽에, 신발에만 며칠을 머물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매주 해 간 숙제가 '요약된 것이라는 걸 다 아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땐 정말 선생님이 모르셔서 아무 말 안 하신 건 줄 알았다. 봐주신 거였다. 쭉 봐주시다가 거짓말을 하는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신것 같았다.

몸처럼 작았던 마음이 커져 이제야, 선생님의 마음이 보였다.

실수투성이인 작은 아이를 보듬어 주었던 크고 보드라운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독후감 쓰기.

그때의 난 그만큼 책이 싫었다. 아니, 책의 재미를 알지 못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저절로 생겨나야 하는 것이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 오늘의 언박싱 _ 신발 >


에스파듀 신발은 발에 맞춰 천이 늘어나서 그 어떤 신발보다 편하다.

이 신발은 윙크를 하는 듯 양 발의 그림이 달라서 예뻤다.

어느 날, 이 신발을 신고 치과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내 발끝을 보며

"저 녀석이 보고 있으니 신경쓰이네. 더 정신 차려서 진료해야겠어." 라고 말했다.

신발덕을 톡톡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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