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하연 Oct 11. 2021

꽃이 입은 옷

( 꽃 )

#1. 화병에 대하여



꽃은 초록 막대 끝에 묻은 물감 같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꽃다발을 샀다. 포장지를 풀어 손질을 하고 선반에 있는 여러 개의 화병 중 하나를 골랐다. 


스카비오사는 맑은 바다색을 품은 민트색 꽃병이 어울렸다. 

보라색의 아네모네는 납작한 도자기 화병에, 

붉은 장미는 라인이 드러나는 갈색 맥주병에 꽂았다.     


어떤 화병에 꽂느냐에 따라 꽃들의 패션은 달라졌다. 꽃들을 들고 인형놀이 하듯 여기 저기에 꽂아 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도 있었다. 꽃에게 옷을 입히고 보면 잘 차려입은 한 사람을 보는 듯했다.  



꽃의 세계에도 패셔니스타가 존재했다.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꽃만 보지 않았다. 꽃의 하의, 화병에도 주목하게 되었다. 이태원역에서 나와 모퉁이를 도는데 다 타고 남은 연탄이 보였다. 검은색의 연탄이 아니라 다 타고 남은 재였다. 손대면 톡 하고 쓰러질 것 같은 살구빛이었다. 어느 골목이 아닌 지하철역 앞에 만난 연탄은 특별했다. 연탄재 구멍에 몇 송이의 꽃이 꽂아 있었다. 비록 조화였지만 툭툭 놓여 있는 모습은 의도된 아름다움이었다. 누가 연탄에 꽂을 꽂을 생각을 했을까? 하나의 구멍에는 한 송이의 꽃이 딱 들어갔다. 여러송이를 풍성하게 꽂을 수도 있었다. 꽃은 연탄재 빈티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우연히 만난 시적인 풍경이었다. 




화병의 끝은 어디일까? 




연탄재 뿐 아니라, 쓰레기통도 화병이 될 수 있었다. ‘Lewis Miller Design’이 진행한 <Flower Flashes>라는 프로젝트로, 그는 뉴욕의 쓰레기통을 화병 삼아 꽃을 가득 꽂았다. 거리를 걷다가 마주치는 쓰레기통, 가로등, 표지판, 벽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했다. 회색 도시 속에 등장한 컬러풀한 장면이었다. 식탁 위에 있던 작은 꽃병이 ‘펑’ 하고 커져서, 거리로 옮겨졌다. 대형 구조물에 장식된 대형 꽃들은 호텔에서나 볼 법한 우아함을 뽐냈다. 누군가의 집에 꾸며 놓은 정원처럼, 시간 내어 찾아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공공미술이었다. 그 길을 스치는 수많은 사람은 깜짝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었다. 


우연히 가다가 만나는 꽃들은 맑은 하늘처럼 마주치는 날씨같은 것이었다. 



---------------------------------------------------------------------------------------


#2 버려지는 꽃들


   

꽃은 시간이 흐르면 시들고, 시든 꽃들은 버려진다. 하지만 시들지도 않았는데 버려지는 꽃도 있었다. 예식장, 개업식, 장례식장에 놓인 화환이었다. 누군가에게 만끽된 후, 소유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감했다. 나는 그동안 꽃집의 꽃들만 눈여겨보았다. 거대한 화환들은 제사상의 사탕같이 무용하다고 생각하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종종 마주쳤던 화환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삿포로에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저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게 오픈을 홍보하고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정장을 입은 직원이 다가오며 우리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했다.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온몸의 감각 버튼을 눌러 무슨 말인지 파악했다.


그곳에는 행사를 마치고 버려진 화환 다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마치 마트의 채소코너에서 상추와 깻잎을 담듯 꽃을 뽑아 갔다. 꽃들을 가져가도 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도 그 행렬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꽃을 몇 개 뽑았다. 끝이 시든 꽃도 있었지만 괜찮았다. 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와 핑크색 장미 몇 송이, 하얀 꽃을 골랐다. 다음 사람을 위해 욕심의 부피를 줄였다. 꽃을 가져가는 즐거움을 여러 사람이 함께 누리길 바랐다.     


손안에 작은 정원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밥을 먹을 때에도 숟가락 옆에 꽃을 두었고, 쇼핑을 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종이가방을, 다른 손으로는 꽃을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서는 그날 마신 음료수병에 꽃을 꽂아두었다. 다음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설 때면 작은 꽃 하나로 내 집에 들어서는 듯했다. 버려진 꽃들이 누군가의 손에서 작은 행복으로 다시 피어났다. 여행은 그날 만난 공짜 행복으로 더 진하게 기억되었다. 


생일

승진

수상

결혼식

프러포즈 등 


인생의 소중한 순간과 끝(장례식)에는 꽃이 함께한다.  없이 인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순간을 맛있게 만들어 주는 다시다 같은 꽃. 조미료 범벅의 요리는 별로지만 꽃 범벅은 늘 환영이다.




< 오늘의 언박싱 _ 꽃 >


꽃을 사는 것은 기분을 사는 일이다.

꽃을 보고 있으면 구겨진 마음이 펴진다. 

한 아름의 꽃을 산 날이면 조금 나눠 윗 집 언니 집, 문앞에 가져다 놓는다. 화사함을 나눈다. 

이전 09화 내 발목, 내가 잡지 않는 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