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 01

연재 소설

by 오 지영

남편과는 둘 다 교직 생활을 했다. 인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몇 년 전 정년을 채워 퇴직했다. 학교가 아닌 집에서 하루 종일 있으니 일상이 무료해졌다. 이제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쉼을 얻은 것인데 어쩐지 둘 다 편치 않았다. 그래서 모아 놓은 돈으로 민우를 위해 서울에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고 남은 돈으로는 소도시로 내려와 구옥을 한채 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이었지만 구옥이 몇 채 남지 않았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구입했다. 기역 자로 되어있는 한옥과 그리고 별채 하나. 모두 거의 새로 짓는 만큼의 공사를 해야 했지만 새로운 시작 같아서 좋았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둘의 연금으로도 충분했다.


지난 스승의 날에는 몇몇 제자들이 찾아왔다. 아직도 이렇게 안부를 주고받거나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었다. 이제는 나와 비슷하게 눈가에 주름이 살짝 져있었다. 그래도 내 눈에는 아직 아이 같았다.


“선생님, 근사하네요. 집이.”

“남편이 애를 많이 썼어.”


우리는 국화차를 앞에 두고 교양 있게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아닌 어른과 어른의 대화였다.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지만 해가 지날수록 힘들다 하는 말이 늘었다. 아이를 키우기도, 일을 하기도 너무 버거운 시대라고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예전처럼 교사와 학생으로 돌아가 무언가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나오지 않았다. 나 역시 모든 게 잘 흘러가진 않았으니까.


민우는 이제 서른셋이 되었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자식이고, 눈이 예쁘고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가는 맑은 아이였다. 어릴 때는 무척 말랐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는 살집이 조금 붙었다. 그리고 서른 이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선생이란 직업은 매년마다 수십 명의 아들과 딸이 생기는 직업이다. 이미 있는 자식들도 많은데 또 수많은 자식들이 생기니 학기 초면 정신이 없었다. 담임을 맡으면 반 아이들의 이름을 빨리 외워야 했고, 아이들의 성향을 빨리 파악해야 했다. 특히나 고3 담임을 연달아 4년째 하던 그 해는 더욱 바빴다. 매일 야자 감독을 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몇 년 동안 남편과 아들의 저녁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었다. 다행히 우리가 열심히 아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성실했고, 공부도 잘했다. 집에 돌아오면 설거지가 쌓여있는 법도 없었다. 아들치고는 살갑고, 다정했다.


민우가 고1 때였다. 잘 그러지 않는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되겠냐 물었다. 바쁜 아침부터 그게 무슨 소리냐 했다.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해져 온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시간을 돌린다면 다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상담을 신청해오는 아이들 대하듯이 대했더라면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민우는 내가 출근하고 남편에게도 한번 더 말했다. 물론, 남편도 아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또 똑같은 일상을 보냈다. 야자 감독을 하고 있는데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박민우 학생 부모님 되시냐는 말에 서둘러 짐을 챙겨 경찰서로 향했다.


민우는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고 했다. 본인은 자살을 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난간에 위험하게 서있는 아이를 보고 인근 주민이 신고했다. 아이는 답답해서 바람을 쐬려고 했다고 답 했지만 경찰이 부모님이 와야 집에 갈 수 있다 하여 전화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경찰에게 그럴 아이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도대체 그럴 아이는 어딨고 그렇지 않을 아이는 어디 있단 말인가.



민우는 집에 오는 길 내게 미안하다 했다. 학교에서 야자 감독을 하다 뛰쳐나오게 해서, 걱정을 시켜서, 자신이 아닌 다른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방해해서. 지금 생각하면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부모에게 아이 말고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때, 나는 민우에게 사과하지 말라 했어야 했다. 그리고 물었어야 했다. 지금 네 상태는 어떤 상태냐고. 왜 학교에 가기 싫었냐고.


아이는 그 뒤로 두 번 더 죽을 결심을 했다. 역시나 그때 옥상에 올라간 것은 답답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세 번째 행동으로 옮기고 나서 아이는 죽지 않은 것을 몹시 괴로워했다. 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것이냐며 스스로를 탓했다. 그리고 아이는 철저히 혼자 고립되어갔다. 미안하다고 하거나, 그러려 한 것이 아니었다는 변명 또한 없었다.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조차 없었다.


비슷한 일이 세 번이나 일어나자 남편은 민우를 상담받게 했다. 그리고 우리도 부모로서 상담을 받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민우에게서가 아닌 상담 선생님께 전해 들었다. 아이가 왜 그렇게 학교에 가기 싫어했던 것인지. 왜 그날 옥상 위에 서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처음에는 충격적이었고, 그 후로는 계속 후회했다. 우리는 부모로서 아이를 살피지 않았다. 좋은 부모가 되지 못했다. 그래 놓고 좋은 선생이 되겠다고 바삐 움직였다. 좋은 선생 이기전에 좋은 부모여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가끔 학생과 상담을 할 때 우울증이 있으면 상담 선생님께 인계한 뒤 결과를 듣고 부모를 학교로 소환했다.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고 집에서 조금 더 신경을 써달라 부탁하거나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 권해드렸다. 그 부모들은 어떻게 했을까. 병원에 아이를 데려갔을까. 집에 가는 길에 이런 일로 학교를 오게 만드냐고 혼을 냈을까.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 후의 일까지 생각지 못했다. 그 부모들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내 아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또한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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