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SBS에서 연락이 온 것은 인코프에서 코워킹 시리즈를 편집하고 있을 때였다. 지원했던 게 한 달 전이라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메일을 받았다. 답이 늦어 미안하다며 아직 관심이 있으면 면접을 보고 싶다고 했다. 본사가 시드니에 있었기 때문에 전화로 해야 했다. 이메일에 ‘Your qualifications make you an excellent candidate for this role’이라고 쓴 부분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가볍게 하는 말 같지가 않은 건 내 착각이었을까? 모두에게 똑같이 한 말에 너무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을까?
전화 면접의 두려움은 배로 컸다. 영어로 통화하기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운 게 면접이었다. 면접 날 나는 학교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일하는 날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내가 혼자서 다른 일을 해도 상관치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SBS란 회사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SBS는 Special Broadcasting System의 약자였는데 처음엔 이민자들을 위한 다국어 라디오 방송국으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티브이 채널을 세 개나 두고 있는 국영 방송국이 된 것이었다.
2시 정각에 전화가 왔다. 나는 사람이 없는 조용한 발코니로 나갔다. 나를 면접 보는 사람들은 알리사와 에이미였다. 스피커폰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누군지 헷갈리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나는 운명에 몸을 던졌다. 공고하고 있는 직책은 Social Video Producer란 자리였다. 사회 이슈를 다루는 영상을 만드는 역할이었다.
"Have you seen our videos on Facebook? What do you think about them?" 알리사가 물었다.
"I think it’s nice and short." 내가 말했다. SBS 페이스북 페이지를 철저히 둘러봤기 때문에 어려움 없이 답할 수 있었다. "Keeping the videos one to two minutes long seems good for social media."
"What do you think you can do to make them better?"
"Adding some graphics and animation would be great. They make videos more fun and engaging."
"How long does it take for you to make one video?"
비디오 하나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 애매한 질문이었다. 영상은 공을 들이기에 따라 얼마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영상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리냐고 묻는 건 그림 하나 그리는 데 얼마나 걸리냐는 것과 같았다. 글쎄, 짧게는 2초에서 길게는 몇 년? 작대기 인간도 그림이고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도 그림 아닌가?
물론 그들에겐 구체적인 숫자를 말해야 했다. "I would say about three to four hours per video."
"That’s good because we are aiming to make two videos per day."
그들은 내가 관심 갖는 시사에 대해서도 물었다. 나는 페미니즘과 LGBT 인권을 언급했다. SBS는 호주에서도 매우 진보적인 매체였고 그런 이슈들을 얘기하는 게 내게 도움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전에 한 비영리단체에서 주관하는 여성 폭력 예방 세미나를 수료했던 일이 있었다. 신체의 폭력뿐 아니라 차별, 혐오 등 여성을 억압하는 모든 것을 주제로 삼아 강사들을 초청하고 토론과 활동을 하는 코스였다. 주최 측은 남자 참가자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있었는데 학교를 통해 접한 공고에 무심코 신청했다가 들었던 이 세미나를 통해 나는 막연하게 지지하고 있던 여성운동에 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이 세미나가 더 특별했던 것은 참가자 대부분이 유색인종이었던 점이다. 호주에서의 페미니즘은 종종 지나치게 백인 여성 중심이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지닌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담론이 돼야 한다는 의미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수많은 인종과 문화의 여성 리더들이 모여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자리가 내게는 매번 큰 감동과 교육이었다. 강한 여성들에게서 나는 항상 경외심을 느꼈다. 그리고 남자의 참여가 얼마나 절실한지도 깨달았다. 여성을 향한 폭력이란 남자의 참여 없인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알리사와 에이미에게 내가 동성애자란 것도 밝혔다. 성적 지향이란 면접관이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내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LGBT 이슈를 말할 수 없었다. 얼마 전 호주의 동성결혼 법제화를 두고 국민 투표가 행해지며 내가 느꼈던 것을 얘기했다. 동성결혼 반대 진영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꽤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행히 내 주변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한 번은 인스타그램에서 한 지인의 포스트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가끔 학교에서 어울리며 친하게 지내던 남자였는데 그의 적나라한 반대 의견을 봤을 땐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내용을 잘못 이해한 것인지 몇 번을 다시 확인했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결혼은 남자와 여자 간에서만 이뤄질 수 있는 일이라며 동성애자들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성스러운 것이라고 했다. 그 후로 주위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친구로, 직장동료로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속으로는 혹시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을까 봐 두려웠다. 이는 곧 나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과 같았다. 결혼이 하고 싶어서 법을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었다. 결혼이란 제도는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동성애자도 이성애자와 같은 권리를 가진 사람인지에 대한 얘기였다. 이에 아니라고 답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양측의 캠페인은 투표일이 가까워지며 더욱 거세졌다. 하늘엔 가끔 ‘YES’나 ‘NO’라는 모양의 구름이 보이기도 해서 깜짝 놀랐다. 알고 보니 비행기를 고용해서 연기로 글자를 쓰는 캠페인이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던 날 아침 나는 다른 LGBT 동료들과 사무실 휴게실에 모여있었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합법화가 선언이 됐을 때 우리는 기쁨과 안도의 탄성을 내질렀다. 누군가 무지개색의 케이크를 준비해 왔고 우리는 초를 붙이고 축하했다.
“Someone’s birthday?” 휴게실에 들르는 직원들은 케이크를 먹는 우리를 보며 물었다.
“Australia said ‘yes’ to marriage equality!” 우리가 답했다.
누구한테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평범함 목요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 이렇게 말하는 한 중년의 여직원도 있었다. “Oh, my daughter and her partner are celebrating, too!”
SBS와의 면접은 큰 어려움 없이 흘렀다. 면접에서 그 정도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이야기가 슬슬 마무리돼가고 있던 중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질문이 있냐고 그들이 물었다. 허점을 찔렸다. 인터뷰 끝에 항상 나오는 말이었지만 깜빡하고 있었다. 똑똑한 질문을 하면 보너스가 될 수도 있지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으면 관심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에 뭐라든 해야 한다는 게 면접의 정석이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No, I think I’m good.” 뜸을 들이다 내가 말했다.
면접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돌려 봤다. 내가 했던 말들과 그들이 했던 말, 그리고 그들이 보였던 반응 하나하나를 기억해 봤다. 다 좋았던 것 같았다. 근데 왜 질문은 하지 못했을까? 미리 외워뒀다가 쓸 수 있는 질문들이 있었다. 내가 보고해야 하는 상사는 누군지, 팀원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물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몇 분의 시간을 돌려 다시 질문을 할 수 있다면 커피라도 끊을 것 같았다.
알리사는 곧 내 추천인들과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그 말이 나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인터넷에 ‘Is contacting references’라고 쳐보니 문장을 다 쓰기도 전에 ‘… a good sign?’이라고 자동완성이 됐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니 추천인 단계까지 갔으면 거의 채용은 됐다고 봐도 좋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떨어진 사람들의 일화도 간혹 보였다.
나는 추천인을 네 명이나 적었다. 모두 학교에서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학생회 미디어 팀장이었던 나탈리를 첫 번째로 올렸다. 나는 나탈리 밑에서 영상 콘텐츠를 많이 만들었고 그 결과 학생회 페이스북 페이지를 어느 때보다 활성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나탈리는 영상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 많은 의존을 했고 내가 프로젝트를 완성할 때마다 ‘Jee-nius’라며 극찬을 하곤 했다. 그녀가 나의 제일 든든한 아군이었다.
두 번 째는 나탈리의 후계자로 들어온 카나기였다. 카나기가 일을 시작했을 즈음에 나는 블렌디드 러닝으로 옮겼기 때문에 같이 작업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여성 폭력 예방 코스를 같이 듣기도 했고 교내 여성 행사나 LGBT 행사가 있으면 우리는 어울리며 금방 친해졌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발표하던 날 축하하는 자리에 같이 있었던 사람도 카나기였다. 카나기는 일보다는 대외활동으로 더 많이 만난 사람이라 내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 보단 얼마나 사회 이슈에 깨어있는 사람인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번째는 이고르였다. 그렇게 내가 무능하게 보던 상사였지만 겉으로는 티 한 번 낸 적이 없었기에 우리 관계는 원만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쁜 감정을 사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이고르에게는 SBS에 내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브리핑을 해 주기까지 했다. 일도 일이지만 그보다 외국인 학생으로서 그렇게 경력을 만들어간 게 훌륭하다는 말로 그들의 심금을 울려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창피한 말인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SBS에 필사적이었다.
네 번째는 스포츠 학과에서 잠시 일했던 사람이었는데 추천인에는 다소 무리를 해서 올렸다. 추천인이 이렇게나 많다고 인맥과 경력을 뽐내고 싶은 마음에 어물쩍 넣은 것이었다. 그는 마침 휴가 중이이라 전화는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라는 왜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았느냐고 했다. 말발을 세워서 나를 제대로 밀어줬을 거라고 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행사 코디네이터란 직책은 영상과 거리가 멀었고 나와 같은 학생 직원이었기 때문에 추천인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더 좋은 작전일 수도 있었다. 사라를 ‘미디어 코디네이터' 같은 직책으로 거짓말을 시킬 수도 있었다. 또 사라와 나는 가까이서 오래간 일해왔기 때문에 더 생생한 증언을 해 줄 수도 있었다. 스포츠 학과 사람 대신 사라의 이름을 넣었으면 빈틈없는 추천인 명단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채용 과정 속에서 잔뜩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는 그런 꼼수는 상상도 못 했다. 내용을 부풀릴 순 있어도 없는 걸 만드는 짓은 너무 큰 부정행위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면 너무 순진하지 않았나 한다. 정말 원하는 일이라면 그 정도로 밀어붙일 배짱은 있어야 했다. 호주에 처음 와서 일자리를 못 구해 고생하던 시절에도 이력이나 비자 정보를 꾸민다는 등 조금만 더 억척스럽게 굴었다면 그렇게 비참한 시간은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후 인코프 사무실에서 촬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나탈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막 알리사와 통화를 마쳤다고 했다. 나를 아주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탈리는 학생회에서 내가 이룬 업적들을 유감없이 모두 전달했다고 했다. 좋은 예감이 들지만 혹시 안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했다.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라고 했다. 그 말에 눈물이 찔끔 났다.
곧 카나기와 이고르에게서도 소식을 들었다. 모두 희망적이었다. 정말 세 명을 모두 접촉하는 철저함을 보니 추천인이 많이 중요했나 보다.
촬영을 마치고 편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알리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무실에서 총알처럼 뛰쳐나가 전화를 받았다.
“We’ve just finished talking to your referees and everyone gave you glowing compliments. And we are happy to offer you the position.”
“Oh, that’s great.” 능청을 떨며 내가 말했다.
“What’s your expected annual salary?”
6만 불이라고 답했다. 초봉 치고는 낮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는 시드니의 물가를 생각해야 했다.
알리사는 바로 동의를 했다. 일은 3주 후에 시작하기로 했다.
통화를 마치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호주에 온 이후로 돈 보내 달라고 할 때 빼고는 생전 하지 않던 전화였으니 엄마는 걱정부터 됐을 것이다. 드디어 직장다운 직장을 잡았고 그것도 큰 방송국이라며 자랑했다. 추천인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한 명 한 명에게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곧 주변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거물이 된 느낌이었다. ‘SBS에 비디오 프로듀서로 들어가서 시드니로 이사 가야 한다'라는 문장은 아무리 말해도 질리지 않았다. 내 생전 이런 말을 하게 되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인코프에도 하루빨리 통보하기 위해 나는 쉬는 날 알리시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알리시아는 아직 급여를 주지 않았다고 사과부터 했다.
“No, it’s not about that, although I’d like to get paid soon.”
“Then what is it?”
“I’m letting you know that I have to leave Incorp because I was offered a full-time position elsewhere.’
“Really? Where is it?”
“It’s SBS.”
“What’s SDS?”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회사냐는 듯 알리시아가 말했다.
SBS 방송국이라고 다시 말했다. 알리시아가 대답했다. “What if we offer you a full-time position?”
영상 제작자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알리시아는 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기가 힘을 써서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며칠을 달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제안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확고했다. 엄청난 연봉이 아닌 이상 SBS에 들어가야 했다.
며칠 후 알리시아를 만났을 때 그녀는 정직원 채용은 어렵겠다고 고백했다. 상부에서 허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속 편했다. 알리시아가 막대한 조건을 들고 왔다면 나는 SBS를 택하며 기회비용을 아까워했을 것이다.
프로젝트가 아무 진행 중일 때 나가는 건 마음에 걸렸지만 죄책감은 느끼지 않기로 했다. 다른 직장의 대우가 나으면 거기로 가는 게 맞는 일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자기 앞가림을 해야 했다. 그게 파트타임에서 풀타임이라면 더욱 당연했다.
인코프를 떠나며 알리시아와 인사를 했다. 알리시아는 시드니에도 지사가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찾아가 도움을 받으라는 너스레까지 떨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웠지만 상상하면 웃긴 장면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가웠다며 우리는 포옹을 나눴다.
“Good luck, Jee. Now I have to go and fire two people.” 알리시아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급하게 자리를 떴다.
블렌디드 러닝에선 나를 위해 점심 회식을 열어 줬다. 또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 작별 파티도 했다.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뒤 한국 노래방을 갔다. 디안드라, 사라, 소피가 모두 모인 자리였다. 멜버른을 떠나는 날 사라와 소피는 공항까지 배웅을 나와 줬다. 또 보자, 내 멜버른의 여인들.